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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윤 Nov 26. 2021

다시 '내 귀에 캔디'

돌발성 난청 일지 3

“삐~삐삐삐~~~~”

아침 6시 30분, 모닝 알람입니다.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엊저녁 준비한 녹즙을 냉장고에서 꺼냅니다. 청경채가 혈전을 녹이는 데 좋다고 해서 청경채와 사과를 착즙기에 넣어 주스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싱그러운 청경채와 사과즙이 목을 타고 짜릿하게 흘러 내려갑니다. 짠 음식과 단 음식은 돌발성 난청에 좋지 않다고 해서 웬만하면 먹지 않습니다.      

아침 시간은 분초를 다투며 바삐도 지나갑니다. 벌써 7시입니다. 10분 안에 차에 시동을 걸어야 합니다. 어제처럼 누군가의 차사고로 고속도로가 꽉 막힐지, 목재를 가득 실은 덤프트럭이 앞을 가로막을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마음이 바쁩니다.     

 커튼 밖을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7시면 푸르게 날이 밝아올 시간인데 밖은 캄캄하기만 합니다. 온통 뿌옇게 짙은 안개가 자욱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꼬불꼬불 언덕길 투성이인 Roero 로에로 지역, 이렇게 안개까지 자욱한 날은 차들이 거북이는 고사하고 달팽이 걸음으로 움직입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 안개등을 켜고 천천히 앞으로 나갑니다. 안개도 정성이 기특했는지 조금씩 길을 열어 보여줍니다.


아침 8시 10분. 고속도로를 타고 토리노 스투피니지 쪽으로 빠져나와 병원 앞에 주차까지 무사히 마쳤습니다. 다행입니다. 8시 반부터 10시까지. 90분의 치료를 위해 왕복 두 시간을 차에서 보냅니다.


돌발성 난청은 응급 질환이라 들었습니다. 갑자기 들리지 않으면 한밤중에도 응급실을 찾아야 한다구요. 적어도 3일, 늦어도 일주일 안에는 스테로이드 약과 주사, 고압 산소 치료가 함께 병행되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렇지 않으면 영영 다시 들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탈리아 프로토콜은 한국의 그것과는 달라도 아주 많이 달랐습니다.      

일주일이 지나고, 청력 검사 후, 얼굴이 하얗게 된 이비인후과 의사가 쿠네오 큰 병원으로 바로 저를 보냈습니다. 하루 만에 큰 병원 전문의를 만났으니 억세게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 좋았다? 한국에서는 어이없는 실소를 지으시겠지요.

쿠네오 산타 크로체 병원에서 다시 정밀 청력 검사를 받았습니다. 뭔가 치료의 실마리가 보일 듯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기대를 했던 걸까요? 검사와 긴 기다림, 의사와의 면담 후에도 스테로이드 약을 처방을 받을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효과가 좋다는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겠거니 했던 기대는 순식간에 날아갔습니다. 의사는 완고했습니다. 보름 동안 약물 치료를 받고, 호전이 없으면 주사 고려를, 그 이후에야 고압 산소 치료가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이곳은 이탈리아지 한국이 아닙니다. 이탈리아 프로토콜은 이렇습니다.” 한참을 의사와 설전을 벌였지만, 번복은 없었습니다. 의사는 수술이 있다며 차가운 어깨를 보이며 사라졌습니다.      

이탈리아 프로토콜만 믿고 보름 동안 넋 놓고 있을 순 없었습니다. 월요일 아침, 토리노에 있는 고압 산소 치료 클리닉에 연락을 취했습니다. ‘이러이러한 상황인데, 골든 타임은 벌써 놓쳐버렸고, 반 귀머거리가 될까 너무 겁이 납니다...... 고압 산소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간호사는 침착하게 준비해야 할 서류를 일목요연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하루 만에 다른 이비인후과 전문의에게서는 고압 산소 치료가 필요하다는 소견서를, 주치의에게서도 치료에 필요한 서류를 건네받았습니다. 화요일 아침 8시에 바로 고압 산소 치료 클리닉 원장과 면담이 잡혔습니다. 답답하던 가슴이 드디어 뻥 뚫리는 기분이었습니다. 드디어 환자의 입장을 이해하는 의사를 만났으니까요. 쉽게 심장 마비에 빗대어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Diciamo.... improvvisamente Lei ha avuto l’infarto sull’orecchio. 말하자면...... 심장 마치처럼 갑자기 귀에 마비가 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무 성과가 없을 수도 있지만, 운이 좋다면, 보통은 10번 치료를 받고 나면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의사의 말에 희망이 생겼습니다.     

여섯 번째인가 일곱 번째 치료를 받을 때였을까요? 책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고압 산소 치료실에는 라디오 방송이 나옵니다. 농담처럼 마치 오른쪽 귀가 반응하는 듯한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습니다. 확신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틀 전부터 거짓말처럼 죽었던 귀가 다시 팔딱이기 시작했습니다. 한 걸음에 고압 산소 치료를 받을 수 있게 소견서를 써 주신 이비인후과 전문의 가띠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다시 청력 테스트 실 안에 앉았습니다. 전혀 들리지 않고 먹통이던 오른쪽 귀가 몇 개의 “삐~~~”소리를 잡아냈습니다. 청력 테스트 박스 밖에서 가띠 선생님이 양손을 번쩍 들어 환호해 주셨습니다.      

10월 28일 오후 4시경부터 귀가 들리지 않았으니...... 꼭 3주 동안 완벽한 반 귀머거리가 되어 지냈습니다. 손으로 만져도 전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오른쪽 귀는 마치 고깃덩이처럼 느껴질 뿐이었죠. 그런데 이제 귀를 만지면 깊은 물속에서 두꺼운 북을 긁는 듯한 낮은 음역의 소리가 들립니다. 이 둔탁하고 멀기만 한 소리가 ‘내 귀에 캔디’입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이 났습니다. 믿기지 않아 계속 귓불을 만집니다. ‘딱딱’하고 엄지와 중지로 캐스트 넛 소리도 내 봅니다. 사람만 보면 귀를 들이 대고 “뭐라도 말해봐.” 합니다. 아직 전화 소리는 멀었습니다. 고장 난 로봇이 낡은 스피커에 대고 말하는 듯 한 찢어진 금속음만 들립니다. 하지만 이 소리도 저에겐 ‘내 귀에 캔디’입니다. 금속음도 좋습니다. 먼 북소리도 좋습니다. 하루 종일 누군가가 내 귀에 달콤하게 속삭여 주면 좋겠습니다. ‘내 귀에 캔디’는 저보고 들으라고 만든 노래 같습니다. 하루 종일, 계속, 활짝 웃음이 납니다.     



2021년 11월 18일 목요일의 기록입니다.


용기를 얻어, 어제저녁에는 토리노 콘세르바토리오에서 열리는 조성진 피아노 독주회도 다녀왔습니다. 오른쪽 귀에서는 계속 삐 하는 이명이 들려와 집중이 쉽지 않았지만, 반 귀머거리에게 콘서트라니요...... 조성진 콘서트는 역시 ‘내 귀에 캔디’였습니다. 완전히 버렸던 희망을 다시 꼭 끌어안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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