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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윤 Nov 14. 2021

해저 15미터의 두려움

급성 난청 일지 2, 고압산소 치료


“선생님은 산소 치료 기간 동안 청력 회복을 못 하셨다고 합니다. 치료가 끝난 후에도 호전된 케이스가 있습니다. 3주 후 청력 재검사하시고 경과를 병원에도 알려 주세요.”


다행히 아직 제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늘 오전,  세 번째 산소 치료를 받는 사인을 하느라 병원 원무과 데스크 앞에 섰을 때입니다. 제 옆 창구에 서 있던 남자분이 들어야 했던 소식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어떤 질문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남자 환자분이 대답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틀 동안 함께 고압력 산소 벙커에 같이 들어가 치료를 받았던 분입니다.


오늘로 세 번째 고압 산소 치료. 오늘따라 산소 벙커가 영화 세트장처럼 보입니다. 동그랗고 작은 두꺼운 창문 때문에 우주선처럼도 보이고 잠수함 같은 느낌도 주는 산소 벙커에 온통 초록색 가운을 입고 두꺼운 호스가 끼워진 산소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마주 보고 앉았습니다. 이 이상한 잠수함이 곧 어디론가 출발할 것 같습니다.


“해저 15미터로 내려간 느낌을 받으실 겁니다.”


해저 15미터..... 이곳에 모인 환자들의 답답함이 해저 15미터만 될까요...... 저처럼 갑자기 어느 날 청력을 상실한 사람도 있었고, 방사선 치료 후 부작용으로 온 장기가 손상된 할머니, 이 이상한 잠수함 속에서 음악이 나올 때마다 까딱까딱 손발 짓을 하며 리듬을 맞추던 골수암 환자도 있었습니다. 


어제 마지막 치료를 받고 환한 얼굴로 인사하던 금발 단발머리 환자가 떠오릅니다. 운이 좋은 케이스였습니다. 청력 상실 5일 만에 주사 치료를 받고, 고압 산소 치료까지 받았다죠.


“아직 귀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리지만 참을 만해요.”


끊임없이 들려오는 폭포수, 고장 난 라디오의 지직 거림, 금속 나비 떼의 세찬 날갯짓, 한 맺힌 여귀의 한숨소리까지...... 귓바퀴 밖에서 들려오던 소리 대신, 귓속에서 계속 이상한 소리들이 들려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 곧 좋아질 거야!” 나중에 실망할까 두려워서일까요? 이상하게도 좀처럼 청력이 돌아올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저는 그리 썩 운이 좋은 케이스는 아니었습니다. 10월 28일 오후에 오른쪽 귀가 먹었지만 이탈리아 연휴 기간으로 전문의를 빨리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후 안타깝게 두 번의 오진으로 치료 기간을 놓쳤습니다. 


인자한 미소로 걱정하지 말라며 따스한 손을 어깨 위에 올려주던 하얀 머리칼의 가띠 선생님. 그 온화한 얼굴이 청력 검사 박스 밖에서 딱딱하게 굳어갈 때 저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또록또록 흘러내렸습니다. 가띠 선생님은 급히 큰 병원 예약을 직접 잡아 주셨습니다. 


“저 급성 난청 맞죠?”

쿠네오 병원의 레르다 전문의는 그렇다고 처음으로 제 말에 동의를 해 주었습니다. ‘드디어 주사치료와 고압 산소 치료를 받을 수 있을까?’싶은 희망도 잠시......


“ 불행히도 여긴 한국이 아닙니다. 우선 내복약 치료를 하고 15일 후 주사 치료 여부를 결정합시다. 그래도 호전이 없으면 고압 산소 치료로 들어갑니다. 이탈리아 프로토콜은 이렇습니다.”


쿠네오 병원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 모릅니다. ‘정말 위급한 병이라고 했는데.... 한시가 급한데.... 왜 스테로이드 주사도 고압 산소 치료도 안 된다는 거지? 한국에서였다면 분초를 다투며 치료를 받았을 텐데......’ 마음이 바짝바짝 타들어 갑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가띠 선생님이 고압 산소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소견서를 써 주셨습니다.


고농도의 산소 호흡을 통해 죽은 기관을 활성화한다...... 공상 영화 대본 같기만 합니다. 초록 가운에 커다란 호스가 달린 산소마스크를 쓰고 마주 앉은 사람들...... 오랜 투병으로 너무 하얗거나 시커먼 얼굴들에 치료에 대한 희망이나 기대감은 보이지 않습니다. 


가뜩이나 심란한데 오른쪽 귀는 눈치도 없이 이젠 작은 풀벌레 소리, 억새밭 거센 바람 소리를 만들어 냅니다. 가만히 눈을 감아봅니다. 산소가 오른쪽 귀의 잠든 기관으로 들어가 청력을 깨우는 상상을 합니다. 


압력을 높이느라 산소 벙커 속 온도가 퍽 높습니다. 높은 압력 때문에 양쪽 귀가 자주 막힙니다. 계속 조금씩 침을 삼키면서 고막이 상하지 않게 조절합니다. 10분이 흐르고, 산소마스크를 꼭 조입니다. 높은 온도와 고동노의 산소, 크게 들리는 호흡소리. 모르는 사이 스르륵 잠이 몰려옵니다. 


이리 뛰고 저리 뛰었는데도 골든 타임을 놓쳤습니다. 안타깝고 속상합니다. 어쩔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우선 실없이 빙긋 웃어봅니다. 한결 낫습니다. 


 매 순간 불안해한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고압 산소 치료는 보통 10회 치료 후부터 효과가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미리 울지 않겠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돌발성 난청...... 

3주 동안 하루 반나절을 꼬박 치료만을 위해 보냅니다. 

희망과 기대를 억지로라도 가지는 게 귀를 위한 예의겠지요. 

치료에 집중할 수 있게 허락된 시간과 환경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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