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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윤 Nov 07. 2021

그레이스 켈리의 딸, 모로코의 공주를 기다리며

특별한 손님을 위해 11월 정원의 마지막 장미를 꺾었습니다.


“토요일 저녁 4 사람 자리가 있나요?”

“죄송합니다. 토요일 저녁 유일한 4인 테이블은 12월 18일에 가능합니다.”

“잠깐 루치아노랑 통화할 수 있을까요?”

“그럼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언제나 있는 일입니다. 28년 간 3대가 합심해 운영하는 오스테리아.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스위스, 독일, 미국까지 입소문이 난 유명세에, 타르투포 성수기가 겹쳐 금요일과 토요일 저녁 좌석은 몇 달 전부터 만원입니다. 게다가 예약 문화에 익숙하고 치밀한 계획이 일상인 스위스나 독일에서 온 손님들은 저녁 식사 후 돌아가면서 1년 후 예약을 하고 갑니다. 그러니 금요일 저녁 통화 한 통으로 다음날 저녁 토요일 4인 테이블을 예약한다는 건, 누군가 급히 예약 취소를 하지 않는 한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친구 찬스’를 쓰려는 사람들이 많아지지요. 

“나 루치아노 진짜 친한 친구예요. 참...... 사람이 이렇게 부탁하잖아요. 한 자리 만들어 줍시다!” 거절도 한두 번이지 곤란해지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한 번은 이런 전화도 받았습니다.

“내일 아침 볼로냐에서 출발하는 데 말이죠. 루치아노한테 똑똑하게 전해요! 4인 좌석을 준비해 놓지 않으면 그 레스토랑 불 싸지른다고요!”

“네???”

“나 아주 골수 마피아 일원이니 알아서 해요.”

“그렇다면 화재 방지를 단단히 할 수 있게 이름이랑 전화번호를 남겨 주시겠습니까? 루치아노가 돌아오는 즉시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진짜 불지를 마음이니 알아서 하슈!”

“일단 전화드리겠습니다. 원하는 대로 하시지요.”

루치아노는 그저 껄껄 웃기만 했죠.

“볼로냐에서 잘 오라구! 어쨌든 좌석은 없다. 그래, 거기 가서 먹어. 니 마음대로 해라.”     


아니나 다를까 이번 전화도 이런 협박이었을까요?

“야! 루치아노! 잔말 말고 4인 테이블 준비해!”

“인마, 테이블을 내 정수리에 얹으랴? 없는 자리를 어떻게 만들라는 거야?”

“잘 들어! 그레이스 켈리 딸이다.”

“뭐라고? 모나코 여왕 딸이 여길 온다고?”     

유기농 가게보다는 농부 시장을,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보다는 그 지역 오스테리아나 뜨라또리아를 즐긴다는 그레이스 켈리 딸의 특별 요청이 있었다는 겁니다. 첫 딸인 Carolina di Monaco일까요, 아니면 둘째 딸인 Sefanie di Monaco일까요?     


금요일 서비스가 끝난 후 우리는 정말로 없는 특별 좌석을 만들어 냈습니다.      

특별 비밀 손님이 오는 토요일, 저녁 서비스 시작 2시간 전, 오후 5시 30분. 이미 사위는 어둑어둑해집니다. 

‘장미를 한 송이 놓으면 좋을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루치아노 왈, 

“정원에 가서 제일 예쁜 장미를 꺾어올래?” 


정원 가위를 들고 헤이즐넛 껍질이 깔린 정원으로 나갔습니다. 제일 예쁜 장미를 고르느라 시간을 허비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아담한 정원 여러 장미 나무 중, 양지바른 담벼락 앞에 심긴 덕분에 11월까지 노랗고 분홍의 꽃을 곱게 간직한 마지막 장미였습니다. 하얀 테이블 보 위에 놓일 장미를 상상하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아! 그런데 정원에서 약 치지 않고 키운 장미다 보니 꼬물꼬물 진딧물들이 눈에 보였습니다. 하얀 면포를 깔고 장미 푸른 잎 뒤에 숨은 진딧물을 하나하나 잡아냈습니다. 다시 보니 다닥다닥 붙은 날카로운 가시도 신경이 쓰입니다. 아무래도 테이블 보 위에 바로 놓는 건 무리지 싶습니다. ‘고마워요’하면 장미를 잡다가 그 고울 손가락에 생채기가 나면 어쩌나요? 화병을 찾아야겠습니다.      

급히 목이 긴 화병을 찾아 먼지를 닦아냈습니다. 일부러 줄기를 길게 자른 들장미와 퍽 잘 어울립니다.  

    

와인은 어떤 걸로 추천할까요? 이 근처, 차로 15분 거리 바르바레스코에 있는 가야 GAJA 와이너리의 Langhe Rosso DOC SITO MORESCO”를 추천하기로 입을 맞추었습니다. 네비올로와 바르베라 포도 품종에 아주 적은 퍼센트의 메를롯을 블랜딩 한 와인입니다. 프랑스 와인처럼 과하게 오크통 향을 입히지 않고, 포도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우아하면서도 단아한 멋이 있는 와인이라 제가 사랑하는 와인 중 하나입니다. 


농부 시장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웨딩드레스도 과한 프릴이 치렁치렁 달린 것보다는 매끈한 라인을 사랑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와인도 열자마자 바닐라니 리퀴리찌아니 오크통이 주는 향이 코를 바로 스치는, 과한 치장을 한 와인보다는 포도 본연이 주는 기교를 부리지 않은 우아한 와인을 사랑할 것 같았습니다.    

  

안티파스토 첫 시작은 가야 랑게 로쏘로 한다면, 그 후 쁘리모나 세콘도 정도 간다면 바르바레스코나 바롤로를 추천할 수 있겠지요. 20분 거리 바롤로도 좋지만, 이 지역은 바르바레스코 생산이 가능합니다. 작은 와이너리를 소개하면 어떨까요? 성실하고 정직한 형제 클라우디오와 마르코가 운영하는 Rapalino 바르바레스코도 좋고, 4대가 힘을 모아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있는 Cascina Pozzo도 좋습니다. 

가야처럼 큰 와이너리 관계자들이야 눈이나 깜짝할까요. 하지만 라팔리노나 카시나 뽀쪼 와이너리 친구들에게 모나코 여왕 딸, 그러니 모나코 공주에게 그대들의 와인을 추천했다고 하면 얼마나 좋아할까요? 벌써 마음이 들뜹니다.     


아! 잘 되었습니다. 오늘 저녁 특별 손님이 또 있었군요. 근처 카날레 Canale에서 낮에는 경찰로 일하고 저녁에는 가끔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하러 오는 조르조가 오기로 했습니다. 흥겨운 피아노와 유쾌한 손님들이 함께 오늘 저녁은 어떤 장을 또 만들어 낼까요?   


손님 맞을 시간이 다가옵니다. 이제 저도 곱게 다린 옷을 입고 저녁 서비스를 하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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