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종위기종 ‘강제 이주’

강제 이주는 생명을 구하는 일일까 자리를 치우는 일일까?

by natflat

프롤로그: 양동이 하나에 담긴 질문

공사 현장 한켠, 포클레인의 굉음 사이로 작은 양동이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그 안에는 갯벌의 오랜 주민인 흰발농게들이 뒤엉켜 있죠. 누군가 말합니다. “살리기 위해 옮기는 겁니다.”


그 말은 무척이나 선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양동이를 바라보며 한 가지 질문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저 생명들을 다른 곳에 풀어놓는 행위가 정말 그들을 ‘구하는’ 것일까요? 혹시 우리 마음을 편하게 하려는 의식(儀式)은 아닐까요?


1. ‘이사’가 아닌 ‘유배’가 될 수 있다는 것


생태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생물에게 ‘집’이란 단순히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을요.


흰발농게 한 마리가 살아가는 갯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천 개의 조건이 얽혀 있습니다. 모래알의 크기, 조석 주기에 따른 수분 변화, 미생물 군집의 구성, 그리고 오랜 세월 이웃해 온 다른 개체들과의 보이지 않는 경계선까지. 겉으로 보기엔 비슷해 보이는 갯벌도, 그들에게는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이 복잡한 관계망을 무시한 채 생명체만 들어 옮깁니다. 이미 다른 게들이 터를 잡고 살아가는 곳에 수백 마리를 쏟아붓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죠. 이것은 이미 만석인 식당에 손님을 억지로 밀어 넣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먹이를 둔 경쟁, 은신처를 둔 다툼이 시작되고, 결국 원래 살던 개체군과 새로 온 개체군 모두가 위태로워집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도 있습니다. “비슷한 또 다른 그곳에는 원래 이 종이 살지 않았을까?” 이 물음에 명확히 답하지 못한 채 진행되는 이주는 과학이 아니라 희망 사항에 가깝습니다. 염도가 맞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포식자가 많아서일 수도 있으며, 우리가 아직 모르는 어떤 이유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데이터 없이 진행되는 이주는 ‘느린 살처분’이 될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2. ‘차악의 선택’이라는 이름의 자기 합리화


“공사를 멈출 수는 없으니, 이주라도 시키는 게 낫지 않겠어요?”


이 말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무언가를 하는 편이 나아 보이니까요. 윤리학에서는 이를 ‘공리주의적 접근’이라 부릅니다. 전체 피해를 최소화하는 선택이 곧 최선이라는 논리죠.


하지만 이 논리 안에서 철저히 배제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 생명체들이 오랜 세월 누려온 ‘장소에 대한 권리’입니다. 노르웨이의 철학자 아르네 네스는 이런 사고방식을 ‘얕은 생태학’이라 비판했습니다. 인간의 필요를 중심에 두고, 자연을 그 필요에 맞춰 재배치할 수 있다고 믿는 태도 말입니다.

심층 생태학의 관점에서 보면, 터전을 파괴하면서 생명만 살려두는 것은 진정한 생명 존중이 아닙니다. 그것은 개발을 위한 행정적 면죄부에 더 가깝습니다. “우리는 환경영향평가를 통과했고, 이주 조치까지 취했다”는 서류상의 안도감. 그러나 양동이에 담겨 낯선 땅에 풀려난 게들은 그 서류를 읽을 수 없습니다.


3.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비판만 하고 대안을 말하지 않는 것은 공허합니다. 이주가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적어도 우리는 ‘양동이에 담아 옮기는 것’ 이상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


첫째, 서식지를 먼저 가꾸어야 합니다. 게들을 옮기기 전에, 이주 예정지가 그들이 실제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인지 철저히 검증하고, 필요하다면 서식 조건을 복원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전문 용어로 ’서식지 사전 고도화(Habitat Enhancement)’라 부릅니다.


둘째, 옮겼다고 끝이 아닙니다. 최소 5년, 가능하다면 그 이상의 기간 동안 이주 개체군이 실제로 번식하고 정착하는지를 모니터링해야 합니다. “옮겼으니 책임을 다했다”가 아니라, “정착에 성공했으니 책임을 다했다”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고립된 섬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주지가 주변 생태계와 단절되면, 그곳은 천천히 침몰하는 방주가 됩니다. 인근 갯벌이나 습지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생태 통로를 확보해, 유전적 다양성을 유지하고 메타개체군으로서 존속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합니다.


에필로그: 진짜 옮겨야 할 것

어쩌면 우리가 옮겨야 할 것은 게들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자연은 언제든 대체 가능하다”는 우리의 낡은 믿음, “생명체만 살리면 된다”는 편의적 사고방식, 그것들이야말로 다른 곳으로 치워버려야 할 대상 아닐까요.


멸종위기종의 이주가 성공하려면, 생명뿐 아니라 그 생명이 맺고 있던 복잡한 관계의 망까지 존중하려는 정성이 필요합니다. 수십 년간 쌓아온 이웃과의 경계, 조석에 맞춰 굳혀온 굴의 깊이, 계절마다 되풀이해 온 번식의 리듬. 이 모든 것이 ‘집’입니다.


양동이 속 작은 생명들의 무게. 그것은 사실 우리 인류가 짊어져야 할 생태적 책임의 무게와 같습니다. 그 무게를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의 선의는 언제까지고 선의에 머물 뿐, 진정한 보전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 원고의 내용과 이미지는 AI 도움으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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