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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큐레이터 수첩 Apr 21. 2020

[윤정미] 장난감, 남과 여 그리고 칼라

2013. 오보이


장난감, 남과 여 그리고 칼라


안녕, 로렐 & 캐롤라인


너희들의 애장품을 보았단다. 핑크색 리본을 한 키티인형, 핑크색 슈즈, 핑크색 장화와 고양이 얼굴을 한 핑크색 우산. 핑크색 목마와 핑크색 드레스를 입은 인형들. 게다가 핑크색 드레스를 입고 마주 앉아 있는 너희 둘까지. 처음에는 너희들도 그저 애장품 중 하나인줄 알았단다. 좀 커다란 인형.


애장품을 보면서, 그리고 사진 속 너희들을 보면서 너희들이 좋아하는 색깔이 핑크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았어. 어쩌면 로렐은 “전 핑크색이 아니라 보라색을 좋아해요”라고 말할지도 모르겠구나. 사실 로렐의 애장품들은 핑크보다는 보라색이 더 많은 게 사실이니까. 하지만 로렐의 보라색 역시 핑크에 가까운 보라색이라는 걸 너도 알았을까. 그러고 보니 여자 아이들이 핑크색을 좋아한다는 것은 너무 당연하거나 자연스럽게 생각되었던 것 같아. 하지만 말야. 어쩌면 너희들이 핑크색을 좋아한 것이 아니라 너희들에게 누군가 핑크색을 강요했던 것은 아닐까. 신기하지 않니? 너희들이 원하는 물건들 중에 유독 핑크색이 많다는 것이 말야. 왜 동화 속 공주님들은 핑크 드레스를 많이 입는 걸까. 왜 여자아이들의 옷과 신발은 핑크색이 많은 걸까. 언제부터 누가 핑크색이 여자들의 색이라고 만들었던 것일까. 나는 그게 궁금해지기 시작했단다.


사실 내가 너희들의 애장품을 보면서 놀랐던 것은 그 모든 것들이 ‘핑크’로 보여진다는 것 뿐 아니었단다. 너희들의 장난감이라는 것이 한결 같이 인형이라는 점이었어. ‘여자’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인형을 좋아하고, 소꿉놀이를 좋아하는 것일까. 내가 아는 네 또래 친구중에 인형만 보면 도망가는 여자 아이가 있었단다. 그 아이는 인형보다는 장난감 총이나 자동차를 좋아했지. 그 아이의 엄마 아빠는 늘 그게 걱정이었어. ‘여자아이’ 장난감이 총이나 자동차가 말이 되느냐며 말야. 하지만, 장난감이잖아. 장난감에 여자용, 남자용이 있을까.


얘들아, 인형도 좋고 핑크색 드레스를 입은 공주도 좋지만, 세상에는 더 재미있고 신기한 것들이 많이 있단다. 다음번에 너희들의 애장품을 보게 된다면, 좀 더 다양한 것들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너희들의 장난감을 보고서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지만, 너희들이 더욱 궁금해지게 만드는 그런 것들을 볼 수 있으면 좋겠구나.


안녕, 스티브


넌 스포츠 팬인가보구나. 네 또래 남자아이들은 스포츠를 좋아하지. 사진을 보니 그 중 유독 야구를 좋아하나보네. 나도 한 때 어린이 야구단 멤버였는데. 나도 남자냐구? 왜 그렇게 생각했니. 여자는 어린이 야구단을 하면 안되는 건가? 실망스러웠는지 모르겠다만, 난 여자란다. 운동에 소질도 없고, 잘하는 운동도 없지만 내가 네 또래였을 때 나는 야구를 무척 좋아했어. 네가 알지 모르겠다만, 요즘 한국의 야구팬 중에는 여자팬들이 많단다. 야구뿐 아니라 배구팬이나 농구 팬들도 그렇고. 사실 스포츠라는 것이 남자들만의 것은 아니니까 여자들이 좋아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지. 하지만, 아마 네 또래 여자 아이들은 스포츠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많지는 않은 것 같더라. 언제 기회가 되면, 여자 아이들과도 같이 운동도하고 그래보렴. 의외로 여자 아이들 중에도 스포츠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많거든.


스티브, 사진을 보니 네가 좋아하는 색은 아마도 블루? 너의 스포츠 컬렉션이 대체로 푸른색 계열이더라고. 푸른색은 이성적인 색이고, 남자들의 색이라고들 생각하지만, 다른 색들에게도 다양하게 관심을 가져보면 어떨까. 빨강은 빨강대로의 이야기가 있고, 노랑은 노랑대로의 이야기가 있단다. 일곱 색깔 무지개는 일곱 색깔이라 아름다운 것처럼, 많은 색깔들의 이야기는 너를 좀 더 풍성한 감성을 가진 멋진 아이로 만들어줄 지도 모르거든.


다음 번에 만날때는, 스포츠 컬렉션 말고 다른 흥미로운 너의 컬렉션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하며,


에필로그.


로렐과 캐롤라인, 그리고 스티브의 애장품들을 둘러보고 나의 어린시절을 떠올렸다. 나는 ‘딸’이었지만, 나의 엄마는 의도적으로 내가 핑크에 노출되는 것을 조심시켰다.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던 것 같다. 다만, 어렵게 살았던 엄마의 유년시절에 ‘핑크’는 사치스러운 색깔이 아니었기에 그저 엄마에게 익숙하지 않은 색깔이었기 때문이라 짐작했다. 지금도 나는 핑크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문득 옷장을 열어보았다. 로렐과 캐롤라인 혹은 스티브처럼 나에게도 색편향이 있을까 궁금해서였다. 피식 웃음이 났다. 나에게도 있었다. 색편향이라기 보다는 직업탓이겠지만, 내 옷장에는 ‘검정색’들이 가득하다. 특별히 검정색을 좋아한다기 보다는 검정색이 실용적이기 때문이다. 정장으로도 케쥬얼로도 쉽게 쉽게 적용할 수 있고, 파티에도 장례식장에도 무리없는 옷이니까. 게으른 탓에 나에겐 검정색들이 늘어난다.


장난감. 그러고 보니, 장난감에 대한 별다른 기억이 없다. 장난감이 없었던 것은 아닐텐데. 기억에 남는 것은 별로 없다. 어렴풋이 장난감 보다는 그냥 일상용품들을 장난감 삼아 놀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부엌에 있는 모든 식기들은 내 장난감이었고, 잡지에 있는 그림들은 모두 소꿉놀이의 재료였다. 이야기 만들기를 좋아했던 나는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하는 상품화된 ‘장난감’보다는 내 머릿속에서 내맘대로 꾸며낼 수 있는 그냥 일상용품들이 더 재미있었다.


언젠가 로렐과 캐롤라인, 스티브를 만난다면, 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나의 첫 질문은 요즘 너희들이 제일 좋아하는 장난감은 뭐니?라는 물음일 것이다. 그리고 나의 이상했던 장난감들의 이야기를 펼쳐놓으며 아이들의 세계와 나의 오래된 어린시절을 만나게 할지도 모르겠다.


(오보이 수록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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