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이이(邐迤)한 곳으로의 초대
신보슬 (큐레이터)
‘거기’. 여기가 아닌 거기, 저기도 아닌 거기. 거기는 여기보다 좀 멀지만 저기보다는 가까운 곳, 거기는 여기와 이어진 듯 떨어진 곳. ‘거기’는 입밖으로 소리내어 말하면, 거기라는 공간에 시간이 담기고, 지나간 추억이 담길 것 같은 곳이다. ‘거기’는 그렇다. 저기처럼 나와 상관없이 동떨어지지 않고, 여기처럼 살갗에 찰싹 달라붙지도 않지만 내 언저리 어딘가에 이어져 있을 것만 같은 곳이다. 굽이굽이 산기슭처럼 이어지는, 나에게서 나와서 나로부터 조금은 멀어진 그런 곳이다. 그리고 ‘화가’ 이이정은이 ‘그림’을 통해 우리를 초대한 이이(邐迤)한 곳이다.
‘이이(邐迤)하다’
(1) ‘잇따라 나아가다’ (2) ‘산기슭이나 길이 길게 둘이어 뻗어나가다’ (위키피디아)
거기, 철암
철암은 강원도 태백에 있는 탄광마을이다. 석탄사업이 한창 흥했을 때는 인구가 5만명이 넘은 적도 있다지만, 시절이 바뀌고 석탄사업이 사양화되면서 쇄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하나 둘 사람들이 떠나고, 그날의 부귀영화는 과거형이 되어버렸다.
2001년. 서용선, 이경희, 류장복 작가는 할아텍이라는 비정형 비법인 단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철암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어떻게에 대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방법론은 없었지만 직감적으로 철암에 있는 근대산업시설들은 보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매월 셋째주면 철암으로 가서 각자의 방식으로 석탄산업의 잔재를 기록해갔다. 그렇게 <철암그리기>라는 일종의 공공미술 같은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20년 가까이 <철암그리기>는 지속되었다. 그리고 그 시간의 한켠을 이이정은 작가도 함께 했다.
그/녀에게 철암은 중요한 곳이다. 처음으로 자연을 마주한 곳, 자연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 곳, 그리고 자연을 그리게 한 곳이기 때문이다. <철암그리기>에 참여하면서 정기적으로 철암을 오가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산업시설의 잔재가 아닌 ‘자연’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그/녀는 말한다. 사라지는 근대산업시설의 기록을 위해 떠난 길이었지만, 당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자연’이었다고 말한다. 고개만 들어도 눈에 들어오는 산과 나무, 하늘에서 자연을 만났고, 이제는 빈터가 된 버려진 건물을 뚫고 나오는 잡초, 발밑에 피어오른 들꽃, 벽을 타고 자라나는 덩쿨에서 그/녀는 ‘자연’을 보았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폐허가 된 그곳에서 또다시 생명을 키워내는 자연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렇게 자연에 마음을 빼앗긴 그/녀는 ‘자연’을 그림에 담기 위한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다.
“자연(自然, 영어: Nature, 그리스어: physis)은
산, 강, 바다 등 생명력을 가지고 스스로 생성, 발전하는 것을 말한다” (위키피디아)
거기, 자연
그/녀도, 평론가들도 이이정은의 작업은 자연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 산이나 강, 바다, 풀과 꽃을 자연이라 한다면, 그/녀의 그림은 분명 자연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그림 속 자연은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자연이라 하니 자연인가보다 싶다. 처음 작업을 마주하면 캔버스의 붓자국, 물감 덩어리들만 보인다. 힌트는 제목에 있다. 친절하게도 그/녀는 <거기, 산책길>, <거기, 가을로 가는 길>, <거기, 일출 그리고 바다> 이야기해 준다. 그리고 다시 그림을 보면 그제야 이이정은이 보여주고 싶었던 그 자연이 보인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미지로서의 자연은 없다. 느낌으로서의 자연, 기분으로서의 자연이 있을 뿐.
이전에도 그림은 그렸다. 그러나 같은 작가의 작업이라 하기엔, 그/그녀의 그림은 확실히 달라졌다. 자본주의와 소비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던 이전 작업에서 그/녀는 대형마트의 상품들을 소재로 작업을 해왔고, 진열된 상품을 그리는 것에서 시작해서 디지털 프린트에 다양한 매체를 더해가며 변주를 주기도 하고 마트에 진열된 상품들처럼 캔버스를 쌓아서 거대한 기념비를 만드는 등 꽤 오랫동안 작가 고유의 방식을 성실히 만들어 왔기 때문에, 그/녀가 자연을 그린다고 할 때에도 사람들은 내심 그림 속 소재만 달라졌을 것이라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까지 해 온 방식을 과감히 버리고 새롭게 시작한다. 작가가 그동안 구축해온 자신만의 세계를 버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제로베이스에서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것은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고민과 실패가 있었음을 짐작하기에 그림에 남아 있는 붓질의 흔적에서 쉽게 눈을 뗄 수가 없다.
그/녀에게 붓질은 자연을 담는 방식이자, 자연에 대한 작가의 감응을 담는 방식이다. 그렇기에 정적이고 고정된 묘사와 설명으로는 어딘가 부족했다. <살아있음에 대하여>라는 전시와 관련된 인터뷰에서 그/녀는 자연을 그리면서는 평면에 갇혀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회화의 평면성은 때로는 정보를 주고 개념을 정리하기 유리하지만, 개념화 자체가 불가한 ‘자연’을 담아내기에 회화가 가지는 평면성은 한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물성에 집중하였고, 살아있는 것들을 끌어올리기 위해 입체성을 가미하고자 했다고 그/녀는 설명한다. 그/녀가 말하는 입체성은 회화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회화의 본성, 그리기라는 행위와 물감과 붓질이 만들어내는 것에 더욱 천착하게 만드는 본질로의 빠져드는 과정이었다. 멀리서 볼 때는 자연의 이미지를 닮아 있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록 한눈에 파악되지 않는 물감의 덩어리, 색들의 뒤엉김, 붓질에 닿아 캔버스 위로 올라오는 돌기들. 그래서 이이정은의 그림은 멀리서 한번, 가까이서 오래, 옆에서 봐야 하는 그런 그림이다.
거기, 그/녀의 시간이 머무는
이이정은의 거기는 작가의 시간이 머물고 있는 공간이다. 그림 속 거기는 자연을 담고 있지만 그 자연은 속이 텅 빈 누구의 것도 아닌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사유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이미지로 박제된 공간이 아니라 이이정은이라는 한 개인이 발 딛고 서서 바라보고, 느끼는 자연이다. 그 안에는 그/녀가 피부로 느꼈던 겨울의 추위가 있고, 그/녀가 보았던 한여름 소나기가 지난 후 떠오르는 무지개가 있다. 스산한 가을 저녁 느끼는 외로움이 있고, 그/녀가 감동했던 굳은 땅을 뚫고 나오는 새싹의 에너지가 있다. 거기에는 자연이 있지만, 그 자연은 사전적 정의로는 담아낼 수 없는 시간과 감정이 담겨 있는 그런 곳이다. 그래서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치 곁에 그녀가 함께 하는 것 같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지만, 그/녀의 마음을 보고 있는 것도 같다. 거기는 이이정은의 마음과 시선이 이어져 자연에 닿는 곳이다.
거기, 뜷고 나오는
자연은 시시각각 변한다. 새싹이 돋고, 꽃이 피고, 낙엽이 지고, 다시 싹이 돋는다. 추운 겨울 꽁꽁 얼었던 개울물이 어느덧 졸졸졸 흐르게 되고, 여름이 되면 시원한 물줄기를 만들어 더위를 식혀주기도 한다. 이처럼 변화하는 자연은 언제나 경이롭다. 무엇보다 긴긴 겨울을 뚫고 나오는 싹과 도시의 콘크리트을 ‘뚫고 나오는’ 식물의 생명력은 놀라움을 너머 왠지 모르게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이이정은의 거기, 뚫고 나오는 것들에 대한 그림 역시 그랬다.
자연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이 아닌, 자연에서 받은 감동과 생기, 기운 같은 것을 그려내고 싶었기에 그/녀 역시 겨울을 뚫고 나오는 새싹처럼 작업한다. 어느 인터뷰에서 작업하는 방식에 대해 말하면서, 사전에 드로잉을 하거나 사진을 찍은 것을 보고 모사하는 것처럼 ‘사전에 철저히 계획한 후’에 그리게 되면 정작 전달하고 싶은 기운(에너지)를 전달할 수 없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한껏 기운을 모아 한번에 가야 한다. 유화물감으로 그리지만, 마치 동양화를 하듯, 기운을 모았다가 한 번에 풀어내야 한다. 그렇게 바탕을 만든다. 바탕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넓은 붓으로 한 번에 만들어낸 그 면은 그림 속에서 ‘땅’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면 한 면 수도하듯 쌓아올린 그 ‘땅’ 위에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핀다. 화면 가득 꽃잔치가 이루어진다.
최근 그/녀의 작업에 또 다른 변화가 생겼다. 최근 작품을 보았을 때 첫 인상은 화려해졌고, 장식적이 되었다. 왠지 자연과 조금 더 멀어진 느낌이었다. 숲에서 들어가 본 사람은 안다. 그 안에서 만나는 어둠을 집어삼킬 것 같은 녹색과 검정에 가까운 흙색이 오히려 자연이지 않을까. 하지만, 그것이 역경과 어려움을 뚫고 나오는 생명에 관한 것이라면, 그것은 화려한 축제가 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문득 자연을 화면에 그래도 옮기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 떠올랐다. 무엇인가 역경을 뚫고 나오는 생명에 관한 것이라면 그것은 충분히 화사해도 좋지 않을까. 아니, 화사해야 하고, 축제를 닮아야 한다.
거기, 무지개가 떠오르는
“Somewhere over the rainbow/ Way up high/
There’s a land that I heard of/ Once in a lulllaby
Somewhere over the rainbow/ Skies are blue
And the dreams that you dare to dream/ Really do come true
“
(<Over the Rainbow> 가사 중에서)
자연은 녹녹하지 않다. 특히나 요즘처럼 지구 온난화와 기후위기가 극심해지는 시점에서 자연은 마치 인류의 개발과 공격에 분노라도 하듯 태풍을 몰고 오기도 하고, 엄청난 눈을 쏟아내기도 하며, 지진으로 으르렁거리며 생명을 앗아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녹녹치 않은 일상에 자연은 위로가 되기도 한다. 꽃샘추위에도 조금씩 싹트는 새싹에서, 시원하게 펼쳐진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태양에서, 무심코 올라본 하늘 위에 뜬 무지개에서 사람들은 종종 위로받고, 감동한다.
이이정은의 거기에는 종종 무지개가 등장한다. 꽃이나 풀, 나무와 달리 무지개는 누가 봐도 명확하게 무지개다. 이곳과 저곳을 이어주는 무지개. 토네이도에 휩쓸려 강아지 토토와 함게 오즈에 떨어진 도로시에게 꿈과 희망이었던 무지개, 문득 영화 <오즈의 마법사>가 떠올랐다. 토네이도로 강아지 토토와 함께 오즈에 떨어진 도로시가 집으로 가는 여정을 그린 이 영화에서 도로시는 그 유명한 <오버 더 레인보우>를 부른다. 무지개 너머 어딘가의 나라, 꿈꾸기만 했던 것들이 이루어진다는 그곳에 대한 노래를.
모든 이미지가 사실적이지 않은 그림 속에서 시선을 사로잡는 무지개의 등장이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무지개로 인해서 그림 속 자연은 무지개 ‘너머’로 이어지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가 자연 ‘안’에서 만났던 자연과 느낌은 작가의 손을 통해서 캔버스로 이어지고, 캔버스에서 마주하는 자연의 생명력과 경의로움은 다시 무지개를 통해서 그림 밖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굽이굽이 이어지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림을 보는 관객에게 무지개 너머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꿈꾸는 도로시처럼 꿈과 위로를 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거기, 이이한
이이정은은 이번 전시를 <이이하다>라고 하였다. 그/녀를 통해 알게된 이 말은 잇따라 나아가다 혹은 산기슭이나 길이 길게 굽이굽이 이어가다라는 뜻을 가졌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작업 이야기를 듣는 여정이 그랬다. 자본주의와 소비사회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던 강원도 탄광마을에서의 자연, 그로부터 이어지는 작업 기법적인 변화에 이르기까지 다른 듯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이이정은이 초대한 ‘이이한 곳’들을 만났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작가의 마음을, 기분과 생각을 그림에서 보고, 함께 했다. 분명히 그림을 보고 났는데, 영화를 본 것 같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누군가 말했듯이 회화가 고정된 명사가 아니라 움직이는 동사이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녀는 ‘동사같은 회화’를 참 잘하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시: 2월16일-2월29일
장소: 더현대 2층 PB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