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대구예술발전소
신보슬(큐레이터)
0.
꿈이었다. 꿈 속에서도 꿈임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꿈이 깨질 않기를 간절히 바랬던 기억. 누구나 그런 경험 한번 쯤 가지고 있을 것이다. 김안나의 가상현실 작업을 보며, 언제였는지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나지도 않는 그 경험을 떠올렸다. 김안나의 가상현실 작업은 그것이 현실이 아님을 드러내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현실이 아닌 가상의 이미지를 기꺼이 여행하게 된다.
1.
2000년대 초반, 실험적인 가상현실 작품들이 소개되었을 때,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체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분되었다. 거추장스럽지만 HMD 장비를 끼고, 익숙치 않은 컨트롤러를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들어갔던 세계는 확실히 기존의 몰입감과는 다른 차원이었지만, 그것이 전부였던 것 같다. 계속 머물고 싶지도 않았고, 새로운 기술체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고가의 장비와 수고스러운 그래픽작업에 비해 그 결과는 꽤 실망스러웠다. 확실히 회화나 조각에서 얻을 수 있는 감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생각해보면, 그 때 많은 작업들은 현실을 모방하려 했던 것 같다. 현실처럼 보이고, 느끼게 하기 위한 노력, 하지만 이미 충분히 현실적인 현실을 모방할 필요가 있었을까?
2.
일본 출장길이었다. 우연히 근처 미술관에서 정연두 작가의 개인전을 한다 하길래 전시를 보러갔다가 가상현실 기술을 사용한 작품을 보게 되었다. 예전에 정연두 작가가 로뎅의 지옥문을 HMD를 쓰고 감상하는 작품을 보고 난 후, 굳이 왜 저 훌륭한 작품에 기술을 덧붙이려 했을까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렇겠거니하고 별 기대 없이 HMD를 썼다. 전시장 주변은 온통 후쿠시마 인근에서 주워온 쓰레기들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가운데 틈으로 조심조심 걸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HMD를 쓰는 순간, 쓰레기 설치물들은 나뭇잎이 되고, 꽃이 되었다. 버려진 도시의 폐기물들들이 아름다운 숲속으로 바뀌는 체험. 그리고 그 안을 한적하게 거니는 경험. 가상현실의 경험이 필요하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0-1 혹은 2-1.
김안나의 가상현실 작품 역시 비현실적인 이미지들이다. 형광빛이 도는 밝고 초현실적인 컬러, 무지개와 나무, 구름을 걷는 듯한 느낌. <Rainbow Spectra v. 1.0>. 유토피아가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싶기도 하다. 그 안을 이리저리 둘러본다. 익숙치 않은 컨트롤러를 이리저리 사용해보면서 산책하듯 이미지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 어떤 사건도 없으니 긴장할 필요도 없다. 디지털 픽셀로 만들어졌음을 굳이 숨기지도 않는다. 그것이 현실이 아님을, 만질수 있는 물성이 없음을 이미 알고 있다. 속이려 하지 않기에 속아넘어가지 않으려 애쓸 필요도 없다. 눈앞에 펼쳐진 세계를 천천히 돌아보면 된다.
0-2.
2018년 작품인 <subjectivication>은 제목이 알려주듯이 주체에 관한 이야기이다. 작품은 한 인물이 사람들을 죽이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여기에 작가의 나래이션은 9/11 사태에 대한 회고가 덧붙여진다. 당시에는 미쳐 느끼지 못했으나, 9/11 사태 이후에 벌어지는 지속적인 대립과 갈등의 시대, 여전히 휴전상태에 머물러 있는 한국전쟁과 그로인해 벌어지는 집단적 트라우마 상태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자문한다. 그리고 장면은 ‘트라우마 시점2’로 전환된다. 여전히 비현실적인 디지털 공간. ‘트라우마 시점 1’이 기하학적 공간이었다면, ‘트라우마 시점2’는 좀 더 자연에 가까운 김안나 특유의 파스텔톤의 컬러가 지배적인 평화로운 공간이다. 인물은 호수인지 바다인지 모를 물 위에 둥둥 떠 있고, 저편에 무지개가 걸려있다. 작가의 나레이션은 연쇄살인마 제프리 더머(Jeffrey Dahmer)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살해한 피해자들의 시체를 조각하듯 재배열한 것으로 악명높았던 제프리 더머의 이야기에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객체화 하는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물 위에 떠 있는 인물은 그의 또 다른 자아인 듯 한 그를 똑 닮은 인물을 마주하게 된다. 살인, 전쟁 등은 어쩌면 객체화의 정점을 이야기하는지도 모른다. 때문에 이를 극복하는 것은 다시 주체화 시키는 것은 아닐는지, 나아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는지 독백하듯 이야기한다. 전쟁, 주체, 인간, 자연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이야기하는 이 작품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실사 촬영이 아닌, 컴퓨터 애니메이션에 작가의 나래이션을 추가했다. 조금은 직접적으로 작가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것이 컴퓨터 애니메이션 이미지와 만나면서 설명적이고 교훈적이기 보다는 사색적으로 다가온다.
2.
김안나의 작업에는 자연이 많이 등장한다. 나뭇잎이 흔들리고, 호수물에 잔잔한 물결이 일고, 반사하고 비춰지는 등의 일은 사실 디지털 작업에서 제일 수고롭고 어려운 작업이기도 하다. 그래서 많은 테크놀로지를 쓰는 많은 작업들은 미래의 도시, 미래의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하는지도 모른다. 흥미로운 것은 김안나의 ‘디지털화 된’ 자연 역시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 좀 더 정화하게는 현재에 대한 반성에 가깝다. 지금 세상에서 벌어지는 살인, 갈등, 전쟁과 같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녀는 자연을 가져온다.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현실의 이미지가 아닌, 한땀 한땀 애써 이미지의 세상을 구축해 간다. 그것은 현재 세상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고, 내면의 세계일 수도 있다. 자연을 거닐 듯, 가상의 세계를 거닐면서 만나는 새로운 이미지의 세계.
그래서 김안나의 작업은 그 새로운 이미지를 따라 떠나는 여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