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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큐레이터 수첩 Jun 03. 2020

[문형민] dumb

2008, 개인전 서문

dumb


바보가 아닌 사람에게 바보라고 말해도, 그 사람은 그다지 상처받지 않는다. 

그저 지나는 농담으로 받아넘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보에게 바보라고 한다면? 

겉으로 아닌 척 하더라도 아마 그 사람은 

상처받을 것이다.


문형민의 4번째 개인전을 “dumb Project: vol. 01"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그것은 색맹테스트 그림 속에 쓰여 있는 ‘dumb’이라는 글자로 시작된다. 제3색맹인 청황색맹이 보는 무지개 색을 사용해 그린 이 ‘dumb’이라는 글자 앞에서 관객은 좀 떨떠름해진다. 이런 작업을 하고 있는 작가 자신이 바보라는 것인지 아니면, 그 앞에서 그걸 읽어내려고 애쓰고 있는 관객이 바보라는 것인지 왠지 애매하기 때문이다. 물론 문형민은 오래 생각지도 않고 예술이라는 미명이 만들어낸 이 모든 ‘헛짓’을 하는 자신이 바보라고 슬렁슬렁 대답했다. 하지만, 그저 스쳐가는 그의 대답을 들으면서도 그가 만든 작업들이 그저 그런 ‘헛짓’만은 아님을 눈치 채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는다.     


그의 이야기를 찬찬히 듣기 위해서는 먼저 문형민이 저지른 일련의 ‘헛짓’들을 둘러볼 필요가 있다. 우선 큰 틀로 보자면, 한 번의 개인전에 조각과 회화, 사진 등의 모든 장르를 쏟아 부었다는 것이 그가 저지른 가장 큰 ‘미련한’ 짓처럼 보인다. 일반적으로 개인전이라고 하면, 이전 시리즈에서 조금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던가 아니면 일관된 시리즈 내에서 새로운 작품들을 보여주기 때문에, 여기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dumb Project> 는 개인전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기획전처럼 다가온다. 하나의 시리즈를 끌고 가는 일도 어려운 이 마당에 새로운 장르와 새로운 작업들로 꾸려진 전시를 만들어놓고, 문형민은 묻는다. 

“왜? 개인전은 꼭 한 시리즈로 가야 하는 거야? 라고.     


그리고 그 질문은 전시 전체를 통해 예술과 사회를 둘러싼 소위 말하는 통념이라는 것에 대한 물음표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저 껄렁껄렁하게 왜 안 되는데 하는 식의 치기어린 반항만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그렇게 지난한 과정을 필요한 이 ‘미련한’ 작업을 하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사실 이번 <dumb Project>에 소개되는 작품들은 - 이전 문형민의 작업에서와 마찬가지로 - 깔끔하고 예쁘게 떨어졌다. 하지만 거기까지의 과정이라는 것은 작가가 아이디어를 얻었던 일상에서 겪었던 일, 아니 더 소급하여 그의 청소년기까지의 기억들까지 녹아들어가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예를 들어 ‘재활용 프로젝트 Project: Recycle’ 시리즈 중 <400만원의 제작비를 들여 런던에서의 1회 전시 후 700만원의 운송비를 들여 정식 반입하였으나 보관과 판매의 문제로 파손된 작품으로 만든 개집>의 이 긴 제목은 이 작품의 제작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실제로 이 작업은 2003년 런던의 한 갤러리에서 전시를 위해 제작하여 성공적으로 전시했고, 700만원의 운송비를 들여 다시 들여왔으나 이러저러한 이유로 파손되어 창고에 있던 것을 꺼내서 개집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 돈과 시간을 들여 결국은 개집 하나 만드는 예술이라는 헛짓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실실 웃음이 나오지만, 그저 웃고 넘길 수 없는 씁쓸함이 남는다. 


이 뿐 아니다. 알록달록 열 가지의 색깔들로 화면을 가득 채운 8점의 평면작품 <by NUMBERS Series:  미술잡지 A: 2001-2008>은 미술잡지에 나왔던 기사들을 전부 입력한 후 분석하여 가장 높은 빈도로 출현한 단어10개를 선정하여 개별 색깔을 주어 그린 그림이다. 그런가 하면, <Highway Star>나 <Like Hell>시리즈는 누구나 한 번 쯤은 해봤을 법한 팝송을 한글로 받아 적어 가며 부르던 추억을 끄집어내었다. 한 학생에게 작가의 고교시절 무렵인 80년대 한창 유행했던 팝송을 들리는 대로 한글로 받아쓰게 하고, 그것을 한국말을 전혀 모르는 외국인에게 읽어주고, 들리는 대로 영어로 받아 적게 한 다음 외국인이 받아쓴 (달라진) 영어가사를 가로x세로 200x150 cm의 캔버스 위에 곱게 글로 썼다. 이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서로를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이해하지 못하고 소통하지 못하는 모습이 중간 중간 문법도 안 맞고 가사전달도 안 되는 달라진 노래 가사 같은 신세는 아니냐고 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번 <dumb Project>에 출품된 작품들은 이처럼 모두 각각의 에피소드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화려한 색상과 깔끔한 디자인은 각각의 에피소드를 향해 들어가기 위한 시각적 유혹처럼 작용한다. 겉으로는 예쁘게 치장했지만, 정작 들어가 알고 보면, 예쁘게만 보아 넘길 수 없는 이야기들이기 십상이다. 깔끔한 화이트로 만들어낸 범죄자 초상의 <Puzzle>이 그렇고, 설탕과 밀랍으로 만들어 조각대 위에 놓여 서서히 녹아가는 <melting>에서의 미키마우스가 그렇다. <melting>에서 서서히 녹아가는 미키마우스는 관객들에게 ‘미국’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를 라는 나라를 떠올리게 하고, ‘미키’가 녹아서 무너지는 모습은 미국을 둘러싸고 벌어진 지금의 세계정세를 생각하게 한다. 이러한 특징은 <道不拾遺記念, 1989>에서도 다르지 않다. 중국의 한 시장에서 찾은 抗美援助記念(항미원조기념), 1951년의 마오쩌둥이 그려져 있던 배지를 변형하여 만든 <道不拾遺記念, 1989>에는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주워가지 않는다는, 나라가 태평하게 잘 다스려짐'을 뜻하는 道不拾遺(도불습유)기념이라는 한자와 별, 그 별 가운데에는 엄정화의 얼굴이, 그리고 맨 아래에는 1989년이라는 년도가 쓰여 있다. 1989년은 엄정화가 합창단을 통해 데뷔한 해이기도 하지만, 대학가에서 널리 읽혔던 김수행 교수가 번역한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출간된 해이기도 하다. 이처럼 공산주의, 대중가요, 자본론 등 서로 관계없어 보이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한 화면에 어울려져서 보는 이로 하여금 다양한 레이어들을 넘나들며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시각적 화려함은 그 생각의 단초를 이끌어내기 위한 전략적으로 사용된다.       

문형민이 던진 질문과 물음에 관객들이 저마다의 생각에 빠져있을 무렵.

그는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I am so international", "you're my sunshine, my only sunshine"이라고.     

작품을 돌아보고 다시 바라보는 색맹테스트 그림 "dumb"

작가는 자신이 한 이 모든 헛짓이 바보짓이라고 했지만, 오히려 이 모든 것들이 벌어지는 세상이 어처구니없고 바보스러운 것은 아니냐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모든 것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당신, '관객'이 바보스러운 것은 아니냐고. 그래서 그의 작업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넘기지 못하고, 무엇인가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것도 아니라면, 문형민의 'dumb'은 바보가 아니라, 이 어처구니없는 세상에 ‘말문 막혀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세상이 급박하게 변화하고, 예술이 아니라 해도 우리에게는 이미 넘쳐나는 이미지와 여가거리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 곁에 예술이라는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아닐까. 바보짓이라고 못 박았지만, 문형민 역시 바로 그 예술의 기능을 믿고 있는 것 같다. 그저 먹먹하게 사는 세상을 조금 뒤틀어 보여주어, 세상에 묻어 살지 않게 하는 것이 예술의 작은 역할이라는 것을 말이다. 

문형민의 4회 개인전 <dumb Project>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개인전의 의미보다는 오히려 프로젝트 전반에 대한 일종의 쇼 케이스 같은 성향이 강화된 전시이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 그가 열어놓은 많은 이야기들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기 쉽지 않지만, 이번 전시는 앞으로 그가 어떤 이야기들을 더 활발하게 풀어갈 것인지 예상해 보는 즐거움을 주는 전시이기도 하다. 

비록 예술이라는 것이 세상에 행하는 어떤 의무감 같은 역할이 있다는 것을 그가 동의한다 하더라도, 앞으로의 그의 작업이 관객들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민하게 한다거나, 침울하게 만들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문형민은 가볍다는 것이 진지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작가인 것 같기 때문이다. 이전 작업들에 비해 훨씬 가벼운 제스추어를 취하지만, 세상에 대한 문제의식은 훨씬 강해진 <dumb Project>처럼, 앞으로도 가볍게 진지한 이야기를 하며, 사람들의 뒤통수를 치는 작업을 통해 세상을 온전하게 드러내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굳이 이러한 일들을 바보스러운 일이라 부른다면, 그가 좀 더 당당히 드러내고 바보가 되어, 바보스럽지 않은 이야기들을 바보 같은 세상에게 전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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