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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탈리 Aug 12. 2023

새벽 네 시에 일어나다


건강검진 전날. 새벽 네 시, 정확히 말하자면 새벽 세시 오십 삼분에 일어났다. 대장 내시경 약을 먹기 위해서다. 약을 먹기 전, 직장 동료들이 조언을 해주었다. 잠 잘 생각은 마라. 약 먹기가 제일 힘들다. 젊을 땐 안 해도 된다 등등. 검진 사흘 전부터 식단을 해서인지, 잠은 잤다.


사흘 전엔 흰밥과 흰 것들-묵, 계란, 그릭 요거트-을 먹었고, 이틀 전엔 흰밥과 닭 가슴살로 두 끼를 먹었다. 아무 양념 없이 먹는 닭 가슴살.. 퍽퍽 살을 좋아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운동선수들이나 연예인들의 정신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검진 하루 전엔 본죽에서 주문한 흰 죽 반통을 먹었다. 흰 죽을 꼭꼭 씹어 먹으면 단 맛이 나는데, 단 맛 하나만 느끼니 넘기기도 힘들고 쉽게 물리는 기분이었다. 이럴 땐 김을 먹어줘야 하는데. 김도 못 먹고, 간장도 못 넣어 먹고! 울상을 지으니, 같이 죽을 먹는 아트님께서 동치미 국물은 괜찮다고 하셨다. 먹으니 살 것 같았다. 죽 한 통을 다 먹으려고 했는데, 그새 위가 작아졌는지 배가 꽉 찼다.


집 가는 길엔 좋아하는 쏘쏘한 베이커리에 들렸다. 가족들이 먹는 걸 보려고 츄로스 휘낭시에, 찰떡 휘낭시에, 그리고 약과 휘낭시에를 두 개씩 샀다. 아빠는 약속이 있어 나가고, 엄만 배부르다고 했다. 저녁을 안 먹은 동생에게 냅다 휘낭시에를 보여줬다. 동생은 약과 휘낭시에를 골랐다. 그가 휘낭시에 먹는 걸 1열 직관하며 먹방 유튜버 같은 맛 평가를 해달라고 했다. 동생이 포장을 벗긴 약과 휘낭시에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말했다. 일단, 전체적으로 빵에 코팅이 되어있어. 한 입 베어 물더니, 말이 없다. 뭐야, 말해줘. 나 못 먹어서 맛 궁금하단 말이야! 맛있어. 끝이야? 약과가 안 달아서 좋아. 그러더니 두 입만에 약과 휘낭시에를 끝냈다. 내일 검진이 끝나면 약과 휘낭시에랑 츄로스 휘낭시에부터 먹을 거다.


약은 말대로 먹기가 힘들었으나 다 먹었다. 수클리어는 끝맛에도 오렌지 향이 나서 먹을만했던 것 같다. 교정 유지장치에 용액이 닿아 이상한 맛을 내는 것 빼고는 괜찮았다. 두 번째 파우치를 뜯어 473ml의 물에 섞어마셨다. 처음 먹었을 때보다 맛이 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겨우 다 마시고, 물 한 통을 마셨다. 힘들다. 물이 위장에서 역류하려고 한다. 가까스로 토기를 참았다. 강아지들도 나를 불쌍하게 보는 것 같다.


엄마는 졸린 눈을 하고 방으로 돌아갔다. 토르는 내 옆에 있다. 엄마한테 가라고 해도 내 옆에 꼭 붙어있다. 주방 의자에 앉은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토르.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다가가니, 안아달란다. 토르는 지금 내 다리 위에서 자는 중이다. 그새 꿈나라에 갔는지 다리 근육이 열심히 움직인다.


얼마 전만 해도 토르의 눈에 눈곱이 가득이었다. 결막염 직전이라고 했다. 토르의 매력인 예쁘고 긴 눈썹 때문이란다. 그깟 눈썹이 뭐라고. 진작 밀어줄걸. 미안한 마음을 담아 토르의 눈을 닦아주었다. 고생해서 그런지 얼굴이 정말 노견 같았다. 이번에 집에 오니 토르의 눈이 다 나았다. 얼굴도 회춘했다. 우리 동안 강아지. 토르의 잠을 방해할 수 없어, 안방에 넣어주었다.


온전히 혼자다. 부모님 집에 종종 가지만, 나 혼자 있는 시간은 드물다. 덕분에 집 구경을 찬찬히 했다. 몇 개의 가전과 액자가 들어선 것 빼곤 그대로다. 시간이 나한테만 흐른 것 같다.


나머지 물 한 통을 마시며 병원에서 준 종이를 봤다. 대장 내시경 약인 수클리어산 박스엔 분명 473ml의 물과 함께 마시라고 했는데, 건강검진 병원에서 준 종이엔 500ml의 물과 마시라고 쓰여 있다. 물도 500ml. 난 473ml를 마셨는데.. 27ml, 한 모금 정도의 물을 더 마시기도 힘들다. 이게 퍼스널 트레이너님이 말했던 것과 같은 것일까. 무게를 180kg 드는 사람은 1kg 추가하는 것도 정말 힘들다고 했던 그의 말이 떠오른다. 대장 내시경을 하는 사람도 물 한 모금 더 마시기가 힘들다.


거실 소파에 누웠다. 입추가 지나선지 새벽바람이 제법 선선하다.


새벽 다섯 시 반. 매미가 운다. 새도 지저귄다. 나도 준비가 되었다. 이제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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