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모임이 조금 늦게 끝난 밤. 끝났다는 문자를 보내자마자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올 땐 혼자 대중교통을 타고 간다고 했는데, 시간이 늦어서 걱정이 되었나 보다. 어둠이 내려 조용해진 거리를 걷다가 다시 되돌아왔다. 남편이랑 길이 엇갈리면 안 되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보리색 에쿠스가 다가왔다. 부웅- 노을처럼 따뜻한 두 줄기의 빛이 차가운 어둠 속을 은은하게 밝혔다.
차는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자 서행했다. 굽은 도로를 주행하는 것처럼 지상 주차장을 살폈다. 날이 풀려서인지 자리가 없었다. 지하로 가려는데, 나가는 길목에서 최신형 싼타페가 하얗게 질린 채로 주차를 하고 있었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니, 싼타페의 창문이 열렸다. 차주가 뭐라고 말을 했는데 들리지가 않아 창문을 열었다.
“뭐라구요?”
“제가아! 초보 운전이어서 정말 죄송해요!”
“아- 괜찮아요~ 천천히 하세요!”
일분도 안 되어 사과를 하다니. 얼마나 불안하고 미안했으면 그랬을까. 남편이 후진 기어를 넣었다. 우리 차가 멀어지자, 그녀는 자신의 차에서 내려 입사 첫날의 신입 사원처럼 분주히 움직였다. 지하 주차장에는 자리가 많았고, 우리 차는 주차 칸에 자석처럼 붙었다. 남편에게 고생했다고 말하며 지하 주차장 계단을 올랐다. 아까 그쪽을 바라봤다. 싼타페는 아직 주차 중이었다.
“자기도 저랬던 적이 있지요?”
“누구나 처음이 있잖아요.”
그래, 모두가 처음 경험하는 것들이 있지. 처음으로 광고주에게 이메일을 썼던 날이 기억났다.
“..그렇게 해서 나탈리가 맡아야겠다.”
“네..?”
그 광고주는 유명했다. 장난기 많은 CD님조차 그녀의 전화가 오면 신병처럼 군기가 바짝 들었으니. 그런 그가 프로젝트 담당자를 바꿔달라고 했단다. 막중한 임무가 내게 오다니. 갑자기 소녀 가장이 된 기분이었다. 한 번의 말실수로 다 된 프로젝트에 재 뿌리는 경우를 왕왕 보았다. 그 한 마디 때문에. 삽십 초도 안 되는 광고를 만들기 위해 달라붙은, 수십 명의 시간과 노력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이 프로젝트가 내게 온 이상, 절대 그런 일이 생겨선 안됐다. 전 담당자에게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을 묻고, 협력사에게도 연락을 돌렸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일의 진행 상황을 파악한 뒤, 떨리는 손으로 메일을 작성했다.
제목: [A 프로젝트] 영상 디스크립션 제안 및 진행 사항
안녕하세요, ㅇㅇㅇ 님.
오늘부터 A 프로젝트의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할 ㅁㅁ의 나탈리입니다.
엔드 부분 디스클레이머 레이아웃 관련하여
3가지 옵션을 제안해 드리니, 의견 부탁드립니다.
오전에 문의하신 아트모드 적용한 영상은
금요일 점심 전에 전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탈리 드림
몇 줄 안 되는 이 메일을 읽고 또 읽었다. 내용이 틀리지 않았는지, 어투가 무례하지는 않은지, 맞춤법은 맞는지. 사실, 회사에서 공유받은 내용을 정리한 것 밖에 없는데도 너무나 긴장이 되었다. 에어컨이 최저 온도로 가동되는 오피스 안. 모두가 얇은 겉옷을 입고 있을 때, 나 혼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CD님, 광고주께 메일 보내려는데 한 번 봐주실 수 있을까요?”
“너 혼자 할 수 있잖아.”
“실수할까 봐요. 한 번만 봐주세요~”
맞춤법 검사를 세 번 하고, 전 담당자에게 다섯 번 확인을 하고, 메일을 보내기 전 CD님께 검토를 받고 나서야 보내기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바로 보낸 메일함에 들어가 오타나 오류가 있었는지 확인했지만.
그 메일을 보낸 날만 서른 통이 넘는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메일이 실시간으로 왔다. 그녀는 궁금한 게 많았다. 뭔가.. 소개팅하기 전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나흘 간 이백 통이 넘는 이메일을 주고받다 보니 패턴이 보였다. 그녀가 원하는 건 딱 세 가지였다. 진행 상황을 미리 보고하고, 확실한 일정을 공유하고, 묻는 질문에 합리적으로 대답할 것. 그렇게 하자, 메일이 절반으로 줄었다.
“오늘 고생했다.”
“CD님이 더 고생하셨죠. 맛있게 드세요!“
CD님과 다른 프로젝트 미팅을 갔다 근처에서 저녁을 먹으려던 참이었다. 뚝배기에 담긴 설렁탕이 식기를 기다리며, 핸드폰의 방해금지 모드를 해제했다. 세 개의 이메일 푸시 알림이 와있었다. 첫 번째 메일은 광고주가 보낸 것이었다. 영상을 거의 새로 만드는 수준의 피드백을 주고 혹시 이틀 뒤 오전까지 전달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두 번째 메일을 확인한 순간, 얼굴이 설렁탕 국물처럼 하얗게 질렸다. 이전 담당자가 가능하다고 답을 한 것이다. 그는 메일에 참조만 되어있을 뿐, 진행 상황을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마지막 메일은 당연하게도, 알겠다는 광고주의 메일이었다.
“CD님 메일 확인하셔야 할 것 같아요.”
CD님은 메일을 훑어보신 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식사를 시작하셨다. 지금 내 하늘이 무너졌는데 이렇게 태평하다니! 나는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가 조감독님께 전화를 했다. 사정을 읍소하듯 설명했다. 파일을 정리해서 드릴 테니, 가능한 부분과 불가능한 부분을 알려달라고. 불가능한 부분은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한지도 알려달라고 말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CD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김포골드라인을 탄 것처럼 파리해진 안색으로 사무실에 복귀했다. 다른 일을 하다가도 한숨이 푹- 쉬어졌다.
퇴근보다 더 간절히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카피님! 일부 빼고는 일정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아요." 편집 업체에서 초반 편집본을 갖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통화가 끝나자마자 CD님께 보고했다. 그리고 광고주에게 이메일을 썼다. 안녕하세요 ㅇㅇㅇ 님, ㅁㅁ의 나탈리입니다. 메일 내용은 반나절 정도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CD님께 다시 메일을 보여드렸다. 메일은 이대로 보내고, 참조에 있던 한 명을 빼라고 하셨다. 메일을 발송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CD님이 광고주에게 따로 사과 메일을 쓰셨다.
야근 택시에 몸을 맡기고 집에 돌아가는 길. 하늘이 유난히 어두웠다. 아직도 가슴 한편이 답답했다. 핸드폰에서 진동이 짧게 울렸다. 광고주의 답신이었다. 안녕하세요 나탈리 님, 그 일정으로 알고 있을게요 그럼. 갑자기 주변이 환해졌다. 택시가 매송 터널을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짐이 사라져서 평소보다 더 밝게 느껴졌다.
스릴 넘쳤던 프로젝트는 순탄하게 마무리 됐다. 프로젝트를 복기하며 생각해 보니, 광고주가 나를 트레이닝시켜준 것 같았다.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지만 덕분에 레벨 업 할 수 있었다. 퀘스트를 깨듯 다양한 광고주를 만났다. 실수도 하고, 돌발 상황도 마주하며 성장했다. 아파트 지상 주차장에서 만난 초보 운전자처럼, 처음을 마주하는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힘내세요! 언젠간 잘하는 날이 올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