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상관 없을 것 같지만 생각보다 친한 사이
저는 물리학과에서 물리학을 공부하였는데요.
물리학을 배우는 과정에서 제가 관심을 갖게 된 분야는 바로 "컴퓨터와 관련이 있는 분야"였습니다.
그래서 두 번의 글에 걸쳐서, 현대의 컴퓨터가 어떤 원리로 동작하고 있는지, 이 기계를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한 것인지에 대해서 '물리적'인 부분을 살펴보았는데요.
현대의 컴퓨터는 '튜링머신'으로, 우리가 내리는 명령을 처리하는 기계입니다. 그런데 이 기계가 알아듣기 위한 명령어는 우리 인간의 언어와는 굉장히 다른데요. 컴퓨터가 알아듣는 언어는 0과 1을 가지고 표현한 이진법 체계로 되어있습니다. 문제는 이 0과 1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였습니다.
오늘날의 컴퓨터는 0과 1을 '전류'로 구분합니다. 전류는 전자의 이동입니다. 전자가 이동하는 '물질'을 열심히 가공해서 부품을 만들면, 그 부품이 0과 1을 표현해주고, 이러한 0과 1을 모아 언어를 만들어서 컴퓨터가 동작하는 것입니다. 전자가 이동하는 '물질', 즉 반도체를 이해하고 제어하는 것은 물리학과 재료공학, 전자공학 등의 협업분야입니다.
현재 반도체 소자는 많은 한계와 비효율에 직면해 있습니다. 오늘날의 반도체 소자는 굉장히 미세한 단위의 공정으로 제작됩니다. 대략 5나노미터인데요. 이게 얼마나 작은 단위냐하면, 사람의 키를 태양에서 지구까지의 거리에 비교한 정도입니다. 너무 작죠?
현재의 소자는 이렇게 작은 단위의 공정으로 만들어지는데, 이보다 더 작게 만들 수는 없을까요? 그것은 '물리학적인 한계'라 불가능합니다. 오늘날 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이론인 양자역학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양자역학은 매우 작은 세계를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나노미터 세계는 양자역학의 지배 하에 놓여있습니다. 이 작은 세계에서는 전자가 벽을 만나도 통과하게 됩니다. 상식적으로 벽을 만난 물체는 가로막혀야하지만요. 이를 '터널링 효과'라고 하는데요. 전자의 이동, 전류를 통제해서 0과 1을 구현해야하는 반도체 소자의 경우, 5나노공정 미만으로 들어서면 '터널링 효과'가 우세하게 되어 전류 제어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게다가 전류를 통제하는 현재 방식의 경우에는 비효율이 있습니다. 전류를 가지고 0과 1을 구분하는 경우, 충분한 양의 전자가 이동해야만 물질이 이에 반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반응의 차이로 0과 1이 물리적으로 구분되는 것인데요. 충분한 양의 전자가 확보되어야하기 때문에, 0과 1을 구현하는데에 낭비가 생기기 쉬운 구조입니다. 전자 한 두개만으로 이진법이 구현되는 것은 물리학적 한계로 불가능하고, 전자의 개수를 유지하자니 반도체의 누설전류라든가 하는 비효율이 생기고...이런 딜레마가 있습니다.
그런데, 전자의 이동인 전류의 흐름을 가지고 0과 1을 표현할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0과 1을 표현하면 안되는 것일까요? On과 Off를 표현할 수 있기만 하다면요.
실제로 정보저장매체에서는 '자기'를 이용해서 정보를 저장해왔습니다. N극과 S극이라는 방식으로 0과 1을 구분하면서요. 문제는 아직까지는 이 자기적인 방식이 정보 저장에도, 또 정보를 지웠다가 쓰면서 명령을 처리하는데에도 현재의 반도체보다 딱히 나은 점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드디스크는 지금은 SSD로 대체되는 추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의 '자성'을 이용해서 0과 1을 표현하는 최첨단의 방식이 물리학, 재료공학 등에서 연구되고 있습니다. 모든 물질 안의 전자는 '스핀'을 가지고 있는데요. 이 스핀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자성의 근원입니다. 이 스핀은 주변의 자석, 혹은 전류에 반응해서 방향을 바꾸게 되고, 이것으로 0과 1을 구현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스핀으로 비트를 구현하는 소자를 '스핀트로닉스(Spintronics)'라고 합니다.
자성 뿐만 아니라, 물질의 상(phase)을 이용한 신개념 메모리도 있습니다. 이를 상변화 소자, 혹은 PRAM(Phase change Random Access Memory)이라고 부릅니다. 이 소자는 상변화를 이용해서 정보를 저장하는 방식인데요. 상변화라고 하면 액체인 물이 얼음이 되거나, 드라이아이스가 녹아서 기체 이산화탄소가 되는 것처럼 '물질의 특성이 크게 변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이 얼음이 되면서는 물 분자간의 거리, 물 분자간의 배열 규칙성이 크게 변하며 상변화됩니다.
PRAM에 사용되는 고체물질 역시도 마찬가지로 상변화로 0과 1을 구현하는데요. 고체물질이 규칙적으로 배열된 경우(결정)와 비교적 불규칙한 경우(비정질)를 0과 1로 구별합니다. 우리가 정보를 읽기 위해서 신호를 주면 소자가 결정, 혹은 비정질이냐에 따라서 전류를 흘려보내기도하고 차단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많은 방식들이 연구되고 있지만, 물리학과 관련된 재밌는 주제들만 골라 소개하자면..
1. 위상물질: 위상 물질은 전통적인 고체와는 다른 진짜 '신물질'입니다. 발견된지도 얼마 안됐습니다. 이 위상물질을 설명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리학과 공학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해오지 않았던, 위상수학이라는 분야를 갖다씁니다. 위상물질은 전류가 흐르지만 물질의 몸통(Body)에서는 전류가 흐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물리적 특성을 이용한 소자를 개발하기 위해 연구가 진행 중입니다.
2. 2D물질: 2차원 물질인데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는 3차원 물질(폭, 너비, 높이)에서 높이가 매우 작아서 폭과 너비가 우세한 물질입니다. 3차원 물질에서 한 원자 층에 해당하는 두께를 떼내는 것만으로도 2차원 물질이 되기도 합니다. 이 2차원 물질은 전류 전달 특성 등이 우수해서 많이 연구되어 왔고(컴퓨터의 속도 등에 영향), 현재는 반도체에도 많이 응용되고 있습니다.
전류, 스핀, 상전이, 위상 물질 등은 그 자체로 상당히 넓고 깊은 분야이기 때문에 대략적인 내용만을 적었습니다.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