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며 괜히 울적했던 때가 있다.
첫째와 둘째를 연이어 낳아 키우며 자동적으로 하던 일을 정리했고, 자연스럽게(내면에서는 격정적으로) 돌봄과 가사노동의 담당자가 되었다. ("담당자님 계세요?" 라는 물음은 "보호자 계세요?"로 치환되었다)
정확한 두 살 터울인 둘째가 첫째만큼 무탈히만 자랐어도 자식 flex하면서(27에 결혼한 내게는 자랑할만한 이력이 없다. 내세울 건 그간 키운 아이 둘. 끝) 카톡에도 올리고, 페이스북에도(이때만 해도 인스타보다 페북 '좋아요'가 대세였다) 줄줄이 육아생활을 게시했을까?
둘째의 나아질 기미 없는 아토피에 움츠러들어 쭈글이로 지내던 시절은 누구와도 닿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카톡도, sns도 자연스레 발길을 끊었다. (남편과 소통 창은 텔레그램)
간간이 들려오는 동기들 결혼 소식에 남편에게 아이 둘을 맡겨놓고 홀로 가서 축의금 봉투만 내고 오던 시절.
<너는 나의 시절이다>라는 에세이를 읽으면서, 아 내 20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내 시절은 오롯이 둘째. 둘째가 나의 한 시절이 되었구나, 그래 니가 전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광명의 빛이 닿기 시작한 것은 올해. 2021.
큰 아이는 드디어 학교 선생님들이 가장 선호한다는 2학년이 되었고, (1학년은 유치원과 초등 사이의 과도기. 아직 수업시간에 돌아다니거나, 중간중간 화장실을 간다거나, 1교시부터 4교시까지 수업과 학교생활의 기본적인 것을 모두 배워나가야 하는 때, 2학년은 아직은 반항심이 없고 기본생활습관은 1학년에서 만들어서 올라옴. 학폭 같은 예민한 부분도 해당되지 않는 저학년.)
둘째 녀석도 형아 학교의 병설유치원에 입학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정말로 걱정을 많이 했다. 과연 단체생활을 할 수 있을까? 정규 일과를 보낼 수 있을까? 학교 급식을 문제없이 할 수 있을까?_알레르기관련)
그래서 3월은 내도록 아이 둘이 등교한 후에도 계속해서 스텐바이 상태였다. 원에서 전화라도 온다 치면 대응과 수습을 하기 위해서...
그랬던 3월도 지나가고(별일 없었다!) 어느새 5월도 끝자락을 향해가는 중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평범할 일과 중 하나인, 유치원 등원이 너무나 감격스러워 매일 등교 사진을 찍고 있다.
그간의 긴 잠수를 뒤로하고, 인스타 계정에 아이 둘과 남편과 함께 올 초 유원지에서 찍었던 사진을 업로드했다. 내친김에 아이 둘과 아빠 셋이서 떠난 등산 사진도 업로드했다.
오랜 시간 닫혀있던 문을 삐걱하면서 열고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인스타 알고리즘은 내가 알만한 사람들을 추천 창에 띄웠다.
그렇게 아는 이름들을 하나씩 클릭해 들어가니 오 이 선배가 결혼해서 아이가 둘이나 되었구나, 심지어 우리 애보다 큰 거 보니 졸업하면서 결혼도 바로 했나 보네?
와 후배 S는 사진마다 유럽이네? 뭐하길래 이렇게 돌아다닐까? 했더니 취업 잘해서 연차 flex였구나.
Y는 캐나다 가서 영영 안 온다고? 그래도 제일 많이 챙겼던 후배인데, 어떻게 이렇게 용감해졌지?
하면서 인스타의 늪에서 허우적대다가 정신을 차리고,
진짜 타임머신은 카톡이었다.
텔레그램에도 많이들 가입했다고 알림이 뜨더니, 카톡은 여전하네.
근 5년, 아니 한 9년을 연락 안 한 이의 최근 소식까지 다 알 수 있는 카톡.
아이를 키우는 집은 아이 탄생부터 돌, 첫 어린이집, 첫 크리스마스, 첫 학예회까지 모든 히스토리가 카톡 프사에 담겨있었다.
마지막 직장의 사장님의 아이들이 그때만 해도 5살, 1학년이었는데 사장님 프로필에는 어엿한 중학생과 사진은 별로 안 찍고 싶은 표정의 고등학생이 되어 아빠 프로필의 메인을 장식하고 있었다.
알고 지낸 대부분의 남자 사람들은 결혼 적령기를 맞아 웨딩화보 거나, 아니면 아기 사진 (^^). (이 분을 만나려고 그렇게 까칠하게 굴었구나?)
여자 사람들 역시 결혼 한 친구들은 대부분 아기 사진, 아니면 이국의 황홀한 뷰가 가득한 여행지에서 모습들.(내 시간 내 마음대로 쓰는 자유 flex가 최고로 부럽네요)
내가 좋아한 이들도 이제는 누군가의 짝이 된 모습에. 흐음. (여보게) 정신 차리시오. 옆에 아들 둘 보고 정신 차리시오!
어느 날, 아이 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날 보면 분명 상대방도 놀랄 텐데, 나는 껑충 뛰어넘어 도달한 그들의 시간에 하염없이 놀라고 있다. (살짝 가서 보고 온 미래는 이랬습니다)
첫 신혼집의 주인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주인집에는 딸이 두 명 있었는데 큰 딸은 대학생이었고, 작은 딸은 입시를 준비하는 고등학생이었다. 음대를 목표로 한 둘째 딸의 방에서는 항상 레슨을 받는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주인집은 1층, 우리 집은 2층) 그랬던 둘째 딸이 음대를 입학하고, 졸업 연주회를 맞이해 보랏빛이 곱게 감도는 드레스를 입고 엄마 아빠(집주인 부부)와 함께 활짝 웃는 모습으로 찍은 사진을 보니 기분이 참 이상했다.
카톡과 sns를 끊었던 시절이 있었다. 내 삶의 보여줄 것이 하나도 없기에, 전하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오랜 시간 발길을 끊었다.
그러다가 들어간 sns는 8년 전에 머물던 나를 8년 후로 데려갔다. 그것은 마치 과거의 내가 미래를 살짝 보고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나는 가끔씩 타임머신*을 떠올린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 볼 만하지만 사실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을 떠난다는 생각은 지금으로부터 멀지 않은 19세기 말에서야 비로소 등장했다. 영국의 작가이자 평론가인 허버트 조지 웰스는 과학적인 이론과 기계적인 장치를 이용해 시간을 여행할 수 있다는 개념을 최초로 적용한 문학작품 『타임머신』을 발표하였다. 웰스의 생물학과 동물학에 대한 깊은 지식과 당시 사회를 강타한 진화론으로부터 얻은 영감을 고스란히 녹여낸 SF 『타임머신』은 출간과 동시에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고, 이 작품으로 말미암아 웰스는 과학과 문학을 접합시킨 SF의 새로운 가능성을 증명하며 ‘SF의 창시자’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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