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오드 May 03. 2021

결혼기념일마다 6인상을 차리는 이유

결혼기념일이 다가오면 설렘보다도 두려움이 앞선다.


나는 프로걱정러 면모가 있는데, 어떤 일이 일어나고 나서는 오히려 쉽게 단념하는 타입이다. 대신에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 단계에서 걱정이 최대치가 된다.




우리 어머님의 종교는 조금 남다르다.

불교도 기독교도 아닌 그 어느 지점인데,  하나님을 섬기기에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기독교 공통점을 공유하면서 이 종교만의 특징인, 가족의 생일은 챙기지 않는다. 

(친정엄마는 결혼 첫 해에 몇 번이고 물었다. "진짜 니 생일 안챙겨주드나?" 결혼 첫 해 엄마는 우리 가족이 된 남편의 생일상을 차렸다. 가족 됨의 환영의 의미였을까. 당연히 시댁에서도 내 생일을 챙겨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어머님의 종교에서는 가족 됨(가족을 이루게 돼 날인)을 상징하는 결혼기념일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그날을 축하한다. 그리하여 나의 결혼기념일은 나와 남편, 둘의 이벤트가 아닌 가족의 행사가 되어버렸다.


시댁 식구들이 우리 집을 방문하는 매해 4월 말이 되면, 나는 6인상을 차려야 하는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처음에는 잘 모르니 분위기대로 맞춰했는데, 살면서 오며 가며 이야기를 들어보니 보통 결혼기념일에는 늘 끼고 있던 아이를 양가 부모님께 살짝 맡겨두고 평소에는 잘 가지 않는(또는 아이가 생긴 후로는 찾기 힘든) 분위기 좋은 곳에서 식사를 한다든가 하는 둘만의 세레모니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일화들을 접하고 나니 나의 결혼기념일이 내겐 때론 시험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얼마나 정성을 다해 준비하는가... 물론 상차림을 평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 1주일 전에는 어머님의 연락이 오는데 이게 나에게는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이 느껴진다. 어머님은 "뭐 어떤 거 준비해 갈까? 떡케익? 과일? 잘하는 횟집에서 회 좀 사갈까?" 하시지만, 그 말은 역으로 무엇을 준비해야 한다 라고 읽히는 것은 며느리인 내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 상차림 그까짓 것, 매일 하는 게 상차림인데... 하며 나를 다독여보지만 그게 4명에서 9명으로 늘어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어떤 메뉴가 손이 덜 가면서도 한 상차림 느낌이 날까... 이번 달 쓰려고 했던 글들의 마감은 4월 25일 2편, 4월 30일 1편인지라 나름 머릿속에서 방법을 강구했다. 결혼기념일 행사는 4월 28일...


최대한 빨리 차리고 남은 시간에는 글 쓰고 다듬어야지! 했지만.


결국 당일 아이들이 하교하고 온 2시부터 6시까지 주방에 서있어야 했다. (새벽에 쓰면 되겠다. 눈뜨니 아침이었다.)


딩동, 문이 열리네요, 그대가 들어오죠.


그렇게 방문한 도련님과 어머님과 함께 7시부터 9시까지 식탁에 둘러앉아 밥도 먹고, 술잔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실 직전까지 상차리느라 허리도 뻐근하고 결혼기념일에 이만한 노가다를 선사한 남편과 식구들을 향한 어둠의 감정이 마구 일었다.


그런데 내도록 바쁜 가게에서 일하며 평소에는 어림도 없을 6시 마감을 하고 온 도련님과 어머님이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니 뜻 모를 감정이 일었다. (그 순간 나도 등골이 오싹, 아직도 며느라기? 아니 그거랑은 좀 다른 감정인데...?) 


어제저녁 장 보러 나서서 트레이더스가 마감할 때 카트를 끌고 나오면서, 그 짐을 올리고 냉장고에 정리해 넣으면서, 그리고 오늘 낮시간을 오롯이 투자해 밥상을 차리면서 들었던 고단함이 싸악 사라지고 술 한잔 들어간 몸에선 알코올의 힘으로 땀이 나고 목소리 톤이 올라가는 등 전반적으로 신명 나는 기분에 휩싸였다


그래서 굳이, 이런 걸 하는 건가? 




다음날 베란다에 빨래를 널다 말고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제 결혼기념일이라 저녁 먹었지. 아니 밖에서 말고 집에서, 우리 집으로 다 왔어. 엄마 몰랐구나 매년 하거든. 근데 진짜 준비하기 싫더라구, 아고 상차릴 거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고단한 거야.


종일 주방에 서서 음식 했지. 저녁에 식구들 와서 밥 먹었지. 그런데 또 다들 맛있게 먹는 걸 보니 기분이 좋네? ..."


(친정엄마) "원래 그래. 하기 전에는 하기도 싫고, 혼자 음식 하다 보면 짜증도 나고 하는데, 식구들이 또 먹는 모습 보면 기분 좋지. 뿌듯하고. 좀 고생해도 여럿이 모여 먹으면 또 그게 보람이 있지. 그래서 하는 거야. 그렇게 다들 하는 거야."


"...그런가..."

 

진짜 말도 안 되는 양가감정을 느꼈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까?


결혼은 불행과 행복의 끝없는 배틀이라고 끄적여 놨었는데, 마침 임경선 작가의 <평범한 결혼생활>에 이런 말이 나왔다.

 

<결혼은 복잡하게 행복하고 복잡하게 불행하다>


애증의 결혼기념일이 이렇게 또 지나갔다.


도련님네 식구들은 다 참석하지 못했다. 원내 코로나19 1차 접촉자가 있어 (2차 접촉자가 되었지만) 자가격리를 위해 불참.  좀 더 부담감을 덜고 차려낸 밥상..



Title. Photo by Tron Le on Unsplash

작가의 이전글 번아웃 엄마에게 필요한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