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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오드 Sep 08. 2021

길 위의 편지

- 북유럽 여행길에 띄운 25통의 편지, 메리 울스턴그래프트 저

<길 위의 편지>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쓴 여행에세이다.


그러나 이 여행에세이가 특별한 것은, 이 글은 단순히 여행과 기록을 위해 쓰인 것이 아니라 청탁을 받은 작가가 그동안 영국인들이 관심의 주요 대상지가 아니었던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여행하며 그들의 삶을 관찰하고, 때로는 비판적으로 서술했다는 지점 때문이다.


여자가 글을 쓰려면 매년 500파운드의 소득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 버지니아 울프가 등장하기 전에, 쓰인 작품이라는 점에서 눈여겨볼만하다.


이 글에서는 여자 홀로 (심지어 갓난아기와 보모를 동행한, 그러나 여행목적지에 따라서 베이스캠프 격인 마을에 아이와 보모는 남겨두고 홀로 탐방을 떠나곤 했다) 

여행하며 겪을 수 있는 고단함과(마음 속에 늘 내재해있는 안전에 대한 두려움) 

현지인들과의 가격흥정, 사회적으로 저명한 인물들과의 교류, 그리고 각 나라에 존재하는 사회제도들에 대한 신랄할 비판과 시도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기존의 감상위주의 여행에세이와는 차이가 난다.


실제로 이 책은 울스턴크래프트가 쓴 작품들 중 최고의 호평을 받았으며 가장 잘 팔렸음으로 그 진가를 증명했다. 스웨덴을 비롯한 유럽 몇 개국에 번역되고, 미국판도 출간되었다.


17세기에 배와 마차를 이용해 여행을 다닌 그녀의 글을 읽으며 나는 자주 셀린 시아마 감독의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떠올렸다. 여성화가 마리안느가 귀족의 딸 엘로이즈의 결혼 초상화를 그리기위해 나룻배를 타고 그녀가 사는 성으로 찾아가는 장면이 오버랩되었다. 거친 파고가 닿는 거대한 절벽과 성, 그녀들이 산책한 해안선의 모습은 책 속에서 메리가 묘사하는 풍경과 겹쳐졌다.



생각지 못한 일정이었던 만큼 두 국가를 가르는 선착장으로 가는 길에 스웨덴 최고의 산지 절벽을 올라야 한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습니다. 절별들 한가운데로 들어서니 바람이 들이치지 않았습니다. 따뜻한 햇살이 일렁이고, 개울이 흐르고, 소나무 숲들이 암벽의 단조로움을 깨주었습니다. 이따금 절벽들은 불쑥불쑥 장엄함을 드러냈습니다. 한번은 아주 근사한 절벽을 오른 후 거대한 골짜기를 통과해야 했지요. 그곳에서 마지막 협곡이 우리를 잡아먹을 듯이 위협하는가 싶더니 방향을 틀자마자 푸른 초원과 아름다운 호수가 눈의 피로를 씻겨주고 우리의 눈을 매혹했습니다. p56


총 25통의 편지가 담긴 이 책은 그 나라에 대한 환경적 묘사와 (우리 눈 앞에는 그녀의 눈높이로 바라본 풍경들이 함께 그려진다) 그 지역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그 사회를 지배하는 법에 대한 관찰이 이어진다. 그래서 한 통의 편지는 다채롭다.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 셸리의 어머니이며, 그 시절 남성 지식인들이 보여준 모순들에 대항해 <여성의 권리 옹호>를 쓴 페미니즘의 선구자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이 얼마나 자주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가를 여행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유려하고 우아하게 표현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사유가 돋보이는 몇 문장을 갈무리 하며 마친다.


듣기로는 이 지역이 스웨덴 최악의 불모지 중 한 곳이라던데, 경작지가 노르웨이보다 더 많았습니다. 다양한 작물이 자라는 평야가 멀리까지 뻗어나가다 해안에 이르러 경사가 지면서 풍광은 끊어졌어요. 마차를 타고 가면서 대충 훑어본 바로 판단하자면, 농업은 노르웨이보다 한층 발달했지만 거주지는 스웨덴이 가난의 면모가 더 짙었어요. p170, 열일곱째 편지 중


국민은 본래 어리석은 법이라고들 합니다. 얼마나 모순적 인가요! 부지런할 이유가 없는 노예들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유일한 동력, 즉 사욕을 가질 수 없어 능력도 키울 수 없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으니까요. 예술과 과학에 소질이 없는 사람들은 짐승 취급을 당해왔습니다. 단지 그들의 실력이 예술과 과학을 생산해내는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는 이유로 말이지요. p57, 58, 다섯 번째 편지 중


그러나 함부르크 사람들을 보면 볼수록 광범위한 투기는 도덕성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제 생각이 더욱 확고해지더군요. 인간은 이상한 기계 같습니다. 인간의 도덕 체계는 일반적으로 하나의 대원칙으로 통합됩니다. 그 원칙도 인간이 제 자존심을 지키는 한계를 태연히 깨부수도록 내버려두면 힘을 잃고 말지요. 인간은 부를 좇으면 좇을수록 인류애를, 다음에는 개개인에 대한 사랑을 저버리게 됩니다. 어떤 건 이해와 충돌하고, 어떤 건 쾌락과 충돌합니다. p222, 스물 세 번째 편지 중


오늘은 토요일이고, 저녁 시간이 평소와 다르게 평온했습니다. 마을은 어디서나 일요일 준비로 분주했지요. 호밀을 가득 실은 작은 짐마차가 우리 옆을 지나갔는데, 추수 풍경을 많이도 보았지만 연필과 가슴으로 담고 싶을 만큼 다정한 풍경이었답니다. 어린 소녀가 머리털이 텁수룩한 말의 등에 다리를 벌리고 올라타 말머리 위로 나뭇가지를 휘둘렀어요. 아버지는 아장아장 걸어와 아빠를 맞았을 아이를 들쳐 안고 짐수레와 나란히 걸었고, 어린 생명은 아빠 목에 매달리려고 두 팔을 뻗었습니다. 페티코트를 입은 여자들 위쪽에서는 한 소년이 옥수수 다발이 떨어지지 않도록 열심히 갈퀴질을 하고 있었어요. p162, 열여섯 번째 편지 중



*Yes24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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