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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오드 Sep 03. 2021

신령님이 보고 계셔

- 홍칼리 무당 일기


전에 살던 동네에는 유난히 골목골목 oo장군, oo보살이라 쓰인 옛집이 많았다. 보통 입구에는 기다란 대나무에 오색의 비치볼과 수박모양의 비치볼과 오방색의 천들을 엮어서 세워두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이쪽 세상과의 경계를 짓는 냥 느껴지기도 했다. 이후에 마을 어르신께 들은바 로는, 바다에 접해있는 이 마을에는 전쟁과 생계로 바다에 나가서 목숨을 잃은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예로부터 그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제가 열렸고, 그 형태가 남아있는 것이 바로 그러한 점집들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샤머니즘은 ‘무당’이라는 존재로 통해 발현되었다. 어쩐지 ‘무당’이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뉘앙스는 조금 무섭고, 두렵다. 신과 영접하는 존재. 이세상과 저세상의 경계에 서있는 이. 샤먼은 신비로운데, 무당은 토속적이고 예스럽다.


예를 들어 이런 무당은 어떤가? 90년대에 태어나 21세기에 신내림을 받고, 2021년을 살아가는 MZ세대 무당. 코로나19시대에는 영상통화로 (혹은 줌으로) 점사를 봐주는 무당이라면 어떤가? 마음속에 존재하던 ‘무당’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은 사라지지 않는가?


오방색의 현란한 한복이 아니라, 무지 티셔츠에 슬랙스를 입는 무당, 조도가 낮은 붉은 조명이 가득한 신당이 아닌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점사를 보는 무당.


우리는 미디어가 보여준 전형적 무당의 이미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요즘 무당은 그런 거 아니니까.


이 책의 저자이며 무당인 홍칼리님은 독특하다. 글도 쓰고(글샤라고도 한다. 글쓰는 샤먼), 공부도 하고, 기도도 올리고, 반려견도 돌보며, 예술작업도 하는 무당이다. 이렇게 보면 무당이 그녀의 코어 정체성이 아니라, 그가 수행하는 여러 역할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본캐, 부캐일수도 있고. 역할극일수도 있고.


젊고, 아름다운 그녀가 ‘무당’이 된 것이 궁금했다. 시원하게 알려준다. 무당되는법 A to Z. 그런데 무당의 보통날들도 궁금하지 않은가? 무당이라고 매번 신과 영접해서 점사만 본다면 그것도 무당의 노동착취아닌가? (무당 노동조합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무당에게도 워라밸이 필요하다. 연애이야기도 있고, 무당 이전의 삶의 이야기도 있다. 첫 책에 비기를 다 털어놓듯 여과 없이 적어냈다. 그 이야기들은 종교 구분없이, 미신론-유신론 관계없이 통한다. 


우리는 고민이 있을 때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심리상담가를 찾아가기도 하고. 실제로 점집(무당이 있는 신당을 의미)은 전통적인=traditional 심리상담소의 역할을 했다. 무당의 어원은 ‘묻는자’다. 


한국의 무당은 왜 묻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을까? ‘무당’하면 느껴지는 이미지는 물어보기보다는 술술 답을 말해주는 모습일 거다. 하지만 무당은 손님이 왔을 때 손님에게 묻고, 신령에게도 묻고, 스스로에게도 물어보는 자다. 그렇게 수행을 해나가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닐까. p89


평소 의지하며 믿는 신이 있다면 그분께 기도를 드리겠지만, 우리는 너무나 알고 싶은 거다. 미래를. 다가오는 미래에 내가 이 시험에 합격할 것인지, 이직을 앞두고 과연 이 회사에서는 승승장구할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지, 이 사람과의 인연에서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지 등등을 너무 묻고 싶은데, 그러한 속내를 여실없이 드러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곳이 아닐까. (완벽한 프라이버시의 공간)


‘무당일기’라는 다소 으스스한 부제를 달고 있지만, 무당 홍칼리의 글은 따뜻하고, 편안하다. 읽다보면 이미 산전수전 공중전으로 겪고 저 앞에 걸어가고 있는 언니가 인생 상담을 해주는 기분이다. 그렇지, 그럴땐 이런식으로 하면 좋아. 그런 방법이 고민이면 이렇게 생각해봐.

그리고 충분히 자신에 대해 고민했기에 나오는 의견들. 이분법적 성적인식에 대해, 환경에 대해,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에 대해, 여성에 대해, 운명에 대해, 팔자에 대해. 그녀의 깊은 사유가 거슬리지 않고(꼰대력없음) 편안히 닿는다.


많은 사람이 운명이 바뀔 수 있냐고 질문한다. 운명, 흔히 팔자라고 하는 게 정말 정해진 걸까. 사주 명리는 기호라서 무한하게 해석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운명의 여덟 글자(팔자)는 바뀌진 않지만 무한한 변주곡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운명이란 명을 운전한다는 뜻이다. 같은 사주팔자라 하더라도 그 사람이 어떻게 변주할 것인가는 그 자신의 의지, 그를 둘러싼 편견과 고정관념을 생산하는 교육, 그와 주변 환경의 일상적 상호작용에 따라 달라진다. 당연하게도 나를 둘러싼 환경과 세상이 나아져야 운명도 나아지는 거다.


운명학은 개개인의 삶을 신화로 만드는 미신이 아니라 고정된 언어를 해체하고 삶을 다르게 해석해보자는 실천에 가깝다. 고정된 관념을 자꾸 버려야 하는 이유는 삶의 무한성을 파괴하지 않기 위해서다. 운명은 하나의 좁은 직선 도로가 아니다. 뻔한 관념인 있어도 뻔한 인생은 없다. p170, 171


나는 진즉에 하지 못한 고민을 하고 있다. 나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질문들이 급격하게 밀려온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해결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결혼이 우측을 차지하고, 고민은 좌측을 차지하고 나란히 나아가고 있는 격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홍칼리 작가가 존경스러웠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자. (예를 들어) 내가 설령 그녀와 같은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을지라도 과연 세간의(부모님의) 눈과 목소리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무당이라니, 말도 안돼. 다들 실망할거야.’ 


그녀는 어떤가?


친구) 칼리는 왜 스스로가 무당이라고 생각해요?

칼리) 음..... 내림굿을 받고 점사를 보고 있으니까요? 사실 무당이라는 직업도 제가 입는 역할 옷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왜 무당이 되었나 생각해보면..... 저는 편견을 부수는 것이 재미있어요. 무당이라는 옷에 묻은 편견을 벗겨내고 싶어서 무당이 된 것 같아요.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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