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으로 유명한 물리학자이다.(이 이론이 발표되며 고전역학의 시대는 끝이 났다.)
우리는 그를 과학자라는 정의에서 뛰어넘어 시대의 천재라는 아이콘으로 기억한다.
그가 현존하던 시대에도 이러한 인식은 마찬가지였는지 많은 기자들이 그에 대한 기사를 다루었다. 그가 혀를 삐죽이 내밀고 있는 사진 역시 끈질기게 따라붙는 기자에게, 대답 대신했던 포즈인데 그 사진은 지금도 유명세를 타고 있다.
<민주주의는 나의 정치적 이상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의 개인으로 존중받아야 하며 어느 누구도 우상화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처럼 나 자신이 지나친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내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된 것이 내 책임이랄 수도 없는 일이다. p26>
<변명할 기회도 없는 상태에서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을 들먹이며 한 얘기까지 공개적으로 해명하라고 한다면 참으로 곤혹스럽다. "아니 그런 끔찍한 운명에 처한 사람이 누구인가요?"라고 여러분은 물을 것이다. 글쎄, 기자가 따라다닐 정도로 대중의 관심을 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당된다는 게 내 대답이다. p81-82>
과도한 언론의 관심과 본인의 의도와는 다른 보도를 확인하면서, 그는 직접 기고문을 내거나, 공개 연단에서 개인의 소명을 표명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하게 된다.
이 책은 아인슈타인의 글을 모아놓았지만, 본인의 과학적 업적에 대한 내용은 전무하다.
세기의 과학자로 명성을 떨쳤지만, 그는 소수민족이었고, 이민자였고, 망명자로서 경험한 것들은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뿌리를 내릴 땅이 없었던 유대인이며, 양차 대전에 크게 관여한 독일에서 태어났기에 그는 전쟁의 서슬 퍼런 얼굴과 민족주의라는 이름하에서 자행되는 만행들에 대해서 일찍이 깨달았다.
<명령에 따른 영웅주의, 무의미한 폭력,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온갖 터무니없는 악행들을 내가 얼마나 증오하는지! 내게 전쟁은 천박하고 경멸스러운 행위다. 그런 끔찍한 일에 가담하느니 차라리 내 몸이 조각조각 난도질당하는 편을 택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류를 높이 평가한다. p28>
제2장 정치와 평화주의에는 주로 이러한 단일 국가들의 개별적인 행동들이 전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어떻게 위협하는지, 그에 맞서서 국제 사회는 어떻게 연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소상히 밝히고 있다.
<전투용 기계가 발달한다는 것은, 만약 전쟁을 방지하는 방법을 금방 찾아내지 못할 경우, 인간의 생명이 위태로워진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전쟁 방지가 중요한데도 지금까지 그 중요성에 값하는 노력은 없었습니다. p105>
늘 기술발전과 그를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장치의 부재에 대한 위험성을 짚었고, 실제로 그는 군비 축소 문제, 군축회의에 관한 입장을 기고문을 통해서 발표해왔다.
이처럼 아인슈타인은 역사 속 과학자와 수학자들이 걷는 길을 가지 않았다.
현실에 맞닥뜨린 문제에 등을 돌리고 본인의 연구업적에만 집중한 것이 아니라, 정치와 인간의 윤리적 도덕적 행위들에 대한 삶의 전반에 관심을 가진 개인이었다.
나아가, 아인슈타인은 지적인 개인들의 연대를 추구했다. 본문에서는 '지식인 협력 기구'라는 제목으로 그에 대한 내용이 서술되고, 연대할 수 있는 인물과는 꾸준히 교류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에게도 서신을 보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프로이트 말이다!)
결코 가만히 앉아서 모든 일이 흘러가게 두지 않는,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적극적인 의견 표명은 후반에 실린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와 나눈 서신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프랑스와 미국에서 벌이는 나치 잔학상 선전 활동에 가담한 아인슈타인'이라는 공개 성명을 아카데미에서 발표했다고, 믿을 만한 소식통이 전해 왔다. 이에 나는 나치 잔학상 선전 활동에 어떠한 역할도 한 적이 없음을 밝히며, 그런 활동을 어디서 목도한 바도 없음을 덧붙인다. (중략)
내가 언론을 통해 발표한 성명에는, 아카데미에서 탈퇴하고 프로이센 시민권을 포기하겠다는 나의 의지가 담겨 있다. 개인이 법 앞에 평등함을 누리지 못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말하고 가르치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나라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 그 이유 또한 밝혔다. p173-174>
시대와 상관없이 가짜 뉴스는 어디에서나 존재했고, 그 뉴스를 무력화시키는 것은 개인이 가진 진실을 밝히는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끈질긴 언론들의 태도에 이토록 다양한 그의 기고문과 성명서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지만, 당시 그가 느낀 당혹감과 불명예스러움은 어느 정도였을까.
19세기를 살았던 인물이 남긴 글들이 현재에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기술문명을 제외하고선 인간의 의식과 문화 수준이 아직 거기서 더 나아가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1930년대 세계 경제 위기에 대한 대처방안을 집필한 글의 일부를 가져와 본다.
<기술 진보가 인류의 생존에 필요한 노동을 크게 줄여주기도 하지만,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중략)
그렇지만 두 가지 대목에서는 경제적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
먼저 산업의 각 분야에서 주당 근무시간 단축을 법제화해야 한다. 그래야 체계적으로 실업을 없앨 수 있다. 동시에 최저임금은 노동자의 구매력이 생산과 서로 보조를 맞추어 갈 수 있는 선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한발 더 나아가, 생산자가 조직을 이용해 독점한 산업에 대해서는 국가가 가격을 통제해야 한다. 새로운 자본의 창출을 합리적인 선에서 유지하고, 생산과 소비를 인위적으로 옥죄는 상황이 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중략) 동시에, 생산 수단(토지, 기계류)의 소유자들이 임금 노동자에게 지나친 전횡을 부리지 못하게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p153-155>
현재를 살았더라도, 그의 통찰력은 유효할 것이다.
나는 이 책을 거실 식탁에 올려두고 오며 가며 읽었다.
독립된 하나의 기고문들의 모음집으로 구성되어 있어, 글 하나를 읽을 때마다 그가 이런 글을 쓰게 된 현실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다양성이 결여된 사회, 그랬기에 유대인을 핍박한 독일이 있었고.
우리의 번영을 위해 상대방을 침탈해도 된다는 논리에서 전쟁이 일어났으며.
나의 종교의 우월함을 내세워 종교전쟁이 일어나는 역사가 떠올랐다.
그는 그 속에서 살아있는 개인이었으며, 시대의 지성이었고, 어디에도 딱 맞게 소속되지 못한 이방인이었다. 마지막 단락에는 유대인으로 살아가는 그의 세계관이 나오는데, 열렬한 시온주의자였던 그가 그런 배경을 갖게 된 까닭을 알 수 있었다.
두 세기 전에 다양성을 꿈꾼 물리학자가 지금 우리를 본다면 어떨까.
다양성 추구, 세계의 평화, 지적 연대, 대중이 아닌 양심이 있는 개인이 중심이 되는 사회는 아직도 요원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