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의 적극적 활용
소싯적의 소개팅 엑셀 파일에 대해 지난 번에 글을 쓴 적이 있다(09. 소개팅 엑셀 파일이 사라졌어요). 엑셀 파일로 정리할 정도의 데이터였다보니, 소개팅을 꽤 한 편이었다. 소개팅을 많이 해서 인생에 도움이 된 게 있냐고 누가 물어본다면, 그렇다고 답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도움이 된 건, 누구든 1:1로 만나도 크게 불편해하지 않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사실 처음 보는 사람과 어색하게 마주 보고 앉아 무슨 할 말이 있겠나. 그럼에도 불편감이 크지 않았던 건, 2가지가 있어서였다. 초반의 적당한 스몰토크, 그리고 질문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대화.
소개팅 초반 스몰토크에서는 날씨 얘기를 포함하여 찾아오는 길이 어땠는지, 이 장소에 와본 적이 있는지, 상대가 정했다면 어떻게 알게 된 장소인지, 이 동네에 가끔/자주 오는지, 주로 어디에서 사람들을 만나는지, 그리고 공통 분모가 되는 주선자와 어떤 관계인지 등을 얘기하는 편이었다. 그러다가 얘기가 무르익어가면, 관심사, 경험, 가치관 등의 이야기로 넘어갔다. 스몰토크는 그야말로 초반 긴장 완화와 본격적인 대화 시작을 위한 가벼운 역할이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건 스몰토크 이후다.
보통 소개팅에 가기 전에 대화 꺼리를 준비하기도 하는데, 준비된 주제는 스몰토크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찌저찌 스몰토크까지는 끌고 왔는데, 준비한 거 다 말하고 나면 더 할 말이 없어 멀뚱거리며 침묵의 압박 속에 숨막혀 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준비한 걸로 초반은 끌어갈 수 있어도 중반 이후 대화부터는 두 사람 사이에서 즉흥적으로 이뤄지는 거라 미리 준비할 수가 없다. 그럴 때 필요한 건 바로 질문력이다. 질문력은 공식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없는 단어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다. 질문력은 알고자 하는 바를 얻기 위하여 효과적으로, 그리고 목적에 맞게 적절하게 물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사실 소개팅에서 이 사람과 앞으로 2~3시간 얘기하고 싶은지 여부는 만나자마자 결정된다. 혹자는 8.2초라 하고, 혹자는 0.1초도 안 걸린다고 하던데, 짧은 시간에 이미 마음은 결정된다. 그럼에도 앞으로의 2~3시간을 잘 보내야하는 것이 소개팅이다. 물론 대화를 통해서 호감 여부가 바뀔 수도 있겠지만, 나의 소개팅 경험에서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관심남이 등장했다면, 안광이 발사되면서 호기심 어린 반짝이는 눈망울이 장착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그 때 필요한 건 2~3시간 동안 예의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기왕이면 재밌고 즐겁게 대화하는 거다. 이성으로 호기심은 없더라도 새로운 사람이라는 자체가 주는 호기심은 있으니까.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주제는, 학생이라면 학교나 전공 이야기, 직장인이라면 아무래도 일에 대한 이야기다. 직장인 시절 했던 소개팅에서는 다양한 직업군을 만났었는데, 처음 접하는 직업군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다. 이런 소개팅 아니면 만나서 이야기 들을 일이 없으니 나름 재미있게 얘기를 나눴던 것 같다. 직장인에게 본인이 하는 일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큰 부담 없이 술술 할 수 있는 이야기다보니, 상대도 어색함 없이 편하게 이야기 했던 것 같다. 나의 질문력이 발휘되기 시작하면, 상대는 말이 많아진다. 마지막에는 '아, 제가 오늘 말이 좀 많았죠? 평소에는 이렇게 말이 많지는 않은데..'라고 하는 경우도 많았다.
나의 질문력은 '어떤'의 적극적인 활용으로 나타났다. '어떤'이나 '어떻게'를 넣어서 질문을 하면, 듣는 사람이 큰 부담이 없다. '그 일 왜 시작하셨어요?'보다는 '그 일은 어떻게 시작하시게 됐어요?'가 낫다. '왜 이직하셨어요?'보다는 '당시에 어떤 마음이라 이직 결심하셨어요?'가 낫다. '왜'는 질문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명쾌하지만, 질문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공격적으로 들릴 수 있다. 사람의 생각과 감정 등 마음은 명확하게 정리되어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왜'라는 질문을 받으면, 본인도 모르는 자신의 마음을 설명해야해서 부담스러워지고, 뒷걸음질 치기도 한다. 부담을 덜어주는 문장 형식의 질문과 본인이 답하기 수월한 주제의 조합은 편안한 대화를 이어가게 한다.
나의 질문들에 상대가 신이 난 나머지, 본인 얘기를 많이 했는데, 나도 내 얘기하고 싶었는데, '**씨(나)는 어때요?'를 잘 안 물어봐줘서 내 얘기는 거의 못 하고 주로 듣고 왔던 때도 있었다. 아무튼 상대가 편하게 얘기하는 것 같아서 나도 편했다. 질문은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원동력이라고 하던데, 세상을 더 좋게 만든 것 같진 않지만, 적어도 소개팅 상대가 낯선 자리에서 느꼈을 어색함은 덜어줬던 것 같다. 아마도 상대가 신이 났던 건, 질문은 곧 관심이기 때문이었을 거다. 이성으로 관심이든, 좀 더 폭넓게 사람에 대한 관심이든, 관심은 사람의 마음을 말랑하게 해준다. '**씨는 어때요?'라고 물어봐주며, 나의 이야기에도 관심을 기울여줄 상대를 원했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소개팅에서 그러한 상대를 많이 만나지는 못 했다.
지금이 금요일 오후 5시 즈음인데, 오늘 저녁 어딘가에서 소개팅 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관심남녀 등장으로 여러분의 안광이 발사되시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