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_발에는 뿌리가 없다잖아

by BONNIE C


“스웨덴 간다.”

“뭐? 상의 한마디 없이?”


그건 제안이 아니었다. 함께 가지 않겠다면, 나 혼자라도 가겠다는 선전포고였다.


“왕의 길을 걷고 싶어.”

“뜬금없이 왜 그렇게 멀리까지?”

“광활한 땅을 밟고 싶다고!”


내 고집을 꺾을 수 없는 D는 마지못해 떠날 준비를 했다.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나에겐 필요한 장비가 하나도 없었다. D도 마찬가지였다. 함께 붓던 청약저축을 깨야 할지도 모를 위기였다. 먹고 자는 데 필요한 도구는 물론, 그것들을 담을 배낭도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다. 50리터가 넘는 배낭을 메고도, 짐 무게는 20kg를 넘기면 안 됐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걷기 시작하면 쉽게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이기 때문이다.


D는 한동안 투덜댔다. 왜 소모품에 큰돈을 써야 하는지, 그에겐 절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진짜 걷기‘가 필요한 때였다. 민박집과 산장에 묵어가며 가볍게 걷는 산티아고 길도 끌렸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많지 않았다. 문득문득 D에게 미안했지만, 내게 좋은 길이라면, 그에게도 좋을 길이라고 믿었다.


새로 장만한 한바그 등산화는 100km 이상 걸어야 진정한 나의 동반자가 될 수 있었다. 주말마다 D와 나는 동네 근처 산부터 하루 20km 이상, 평범하지 않은 길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차로 닿는 길이 아니라, 개척하듯 발로 뚫고 나가는 길이었다. 힘들면 바위에 앉아 서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숲 그늘을 지날 땐 유독 축축하고 서늘했다. 뱀을 만나면 소스라치게 놀랐고, 불구덩이 같이 짙은 노을 앞에선 할 말을 잊었다. 모든 순간은 마음 가는 대로 멈추고, 또 계속 걷는 연속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비행기를 탔고, 무사히 돌아왔을 때 누가 봐도 기미가 핀 내 얼굴이, 반짝반짝 빛났다.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설 때마다 설렌다. 마른땅이든, 젖은 땅이든, 텐트를 펼치고 누우면 나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된다. 텐트 위로 빗방울이 리듬 있게 부딪치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상상을 한다. 새벽에는 텐트문을 열고 새소리를 듣는다. 그 순간, 나에게 없던 날개가 돋는다. 어깻죽지가 근질근질하다. 물을 팔팔 끓여 커피를 내리고, 작은 보온병에 담아 바닷길을 산책하면, 스토아 철학을 사유하는 현인이 된다.


D와는 헤어졌다. 왕의 길은 우리를 돈독하게 만들었지만, 내가 여전히 걷는 동안, D는 고민 끝에 다른 길을 택했다. 서로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우리 발엔 뿌리가 없다잖아. 계속 걸어야 해.” 나는 말했고, D는 정착하고 아이를 갖고 싶어 했다. 나는 더 멀리, 더 자주 세상을 자유롭게 오가고 싶었다. 결국, 내 고집을 꺾지 못한 D와 나는, 서로를 응원하며 악수를 나눴다.


나는 그렇게 혼자가 되어 걷는 여자 사람으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