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 <독일 레퀴엠> 1
병원을 들락거리다 보면 할머니 보호자가 꼬부랑 할머니 환자를 모시고 온 경우를 종종 본다. 예전엔 그 연세에 보살핌을 받으셔야 할 분들이, 오히려 몸도 못 가누시고 말도 잘 못 알아들으시는 어르신을 모시는 모습을 볼 때, 많이 힘드시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요즘 나는 그분들이 부럽다. 너무 부러워서 한번 보면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한다. 내가 노인네가 되어 꼬부랑 우리 엄마를 모시고 다니는 그림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리다. 이제 70 넘으신 엄마가 갑작스레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를 시작하셨다. 40대 초반의 팔팔한 보호자인 나는 늙은 보호자들 옆을 슬프게 지나다닌다.
이성일 선생님의 <브람스 평전>을 읽다가 문득, 브람스는 몇 살에 어머니를 여의었나 찾아보았다. 그의 나이 서른 두 살, 어머니는 일흔 여섯이셨다. 그녀의 죽음에 이어 브람스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 완성되는데, 바로 <독일 레퀴엠>이다.
브람스는 이 곡을 어머니를 위해서 썼다. 정확히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멘토였던 로버트 슈만의 죽음에서 착안해서 초반의 일부를 쓴 후 9년을 묵혔다가 어머니의 죽음을 맞아 완성했다. 가사를 성경에서 직접 골랐고, 레퀴엠 (죽음 이를 위한 미사곡) 이라는 장르의 이미 알려진 구조를 따르지 않고 자유롭게 구성했으며 카톨릭 의례곡으로서 당연히 라틴어 가사가 쓰이던 전통을 거스르고 루터의 독어 성경을 사용했다.
음악가인 아버지에게서는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았다면, 명민하고 신앙심이 깊었던 어머니의 영향 때문에 평생 성경을 가까이 하게 되었다. <독일 레퀴엠>에서 그가 선택한 성경구절들을 듣다 보면 그가 종교서에서 영혼 없이 가사를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매일 읽던 낡고 닳은 성경책에서 오랜 시간 품어온 구절들을 엮어내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의례의 전통이나 교리적인 언어이기 보다, 죽음, 특별히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대한 개인적인 묵상이 담긴 그의 가사가 깊은 공감을 자아낸다.
브람스에게 어머니는 생각만 해도 가슴 아픈 존재가 아니었나 싶다. 태생적으로 건강이 좋지 않고 다리 한쪽이 짧아 아마도 보행에 장애가 있었을 그의 어머니는 마흔을 넘긴 나이에 그녀의 집에 하숙을 들어온 17살 연하의 브람스 아버지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했다. 함부르크 외곽의 시골 하이데 출신의 아버지 요한 야코프는 가출하여 기숙을 하며 악기를 배워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로 살아가던 젊은이였고, 불안정한 악사의 삶 대신 집세와 생활비의 걱정을 덜 수 있는 현실적 선택으로 크리스티아네와의 결혼을 강행했다. 평생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나이차가 많고 성격 또한 매우 달랐던 아버지와의 불화가 내내 지속되어 말년에는 별거에 이르렀던 결혼생활이었다. 브람스는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었으나 그들과 긴밀한 관계는 아니었다. 속마음을 얘기할 수 있는 유일한 가족은 어머니였다.
브람스는 어려서 함부르크 항구 주변의 선술집에서 피아노를 치며 돈을 벌었다. 11살, 12살의 어린 아이를 술집에 보내어 피아노를 치고 돈을 벌게 했던 부모는 도대체 어떤 인간들이었을까. 성인이 된 브람스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에 평생 독신으로 살 수 밖에 없다는 고백을 친구에게 남기기도 했다. 이렇게만 보면 브람스의 부모가 자식을 앵벌이처럼 학대하는 부모였나 싶지만, 그리 단순하지는 않아 보인다. 아이의 재능을 알아본 브람스의 부모는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의 부모처럼 신동 신드롬에 휘말려 아이를 어린 나이에 상품화하기 보다, 오토 코셀이나 에두아르드 마르크센 같은 진중한 스승들 밑에서 아들이 안정적인 음악교육을 받도록 지원했다. 또, 로버트 슈만이 죽은 직후, 브람스는 이미 연정을 느끼기 시작한 클라라 슈만과 남은 여섯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슈만의 집에 하숙을 들어가 집사처럼 생활하기 시작하자, 그의 어머니는 여느 어머니와 다르지 않은 걱정 가득한 편지로 애를 태우며 앞날이 창창한 아들의 결정을 돌리고자 설득하기도 한다.
음악은 총 7악장으로 되어 있다. 원래 6악장이었으나, 초연 이후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이니”라는 이사야서 말씀을 중심구절로 하는 5악장이 추가되었다. 3악장에서는 바리톤의 솔로가, 5악장에서는 소프라노의 솔로가 합창을 배경으로 등장한다. 3악장은 창조주 앞에서 보잘것 없는 인간의 성취가 헛됨을, 그리고 그 삶이 유한함을 읊조리고, 5악장에서는 부활과 영원한 안식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 위안처럼 고요하게 선사된다. 마치, 3악장이 브람스의 독백이고, 5악장이 하늘에 오르신 어머니의 위로인 듯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