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 설날 보너스 얼마 받았노?"
사장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던 것이 생각나 ‘못 받았다’고 했습니다.
1976년. 내 나이 16살 때 이야기입니다. 당시 내 고향 강원도 화천 삼일리는 화전민들이 참 많았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상급학교(중학교)에 진학하는 아이들보다 대도시 공장이나 중국집에 취직하는 애들이 더 많았습니다.
같은 해 초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들이 10명었는데, 중학교 진학한 친구는 딸랑 2명. 저 또한 2명에 끼지 못했습니다.
어느 아주머님 소개로 서울 창동에 있던 자동차부품 만드는 조그만 공장에 취직했습니다.
"니 나이 때는 기술을 배우는 게 최고인기라! 열심히 하그레이!"
사장님 말이 '넌 월급은 없고 먹여주고 재워 주기만하겠다'란 뜻이란 건 한 달 지난 뒤에 알았습니다.
"내가 봉급 많이 주는 곳을 알아놨는데, 우리 도망가자."
내 또래 동료 직원이 말했습니다.
"사장한테 말하고 나가면 되지. 왜 도망가는데?“
"나간다고 말하면 사장이 밥값 내라한다, 안내면 팬다, 지난번에 내가 봐서 안다“
이튿날 새벽, 친구와 가방을 챙겨 쌍문동과 미아리를 지나 동대문 광장시장까지 걸어 나왔습니다. 늦은 저녁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배고픈데 밥 먹을래?"
"니 돈 있나? 난 없다."
그러자 그 친구는 서울에서 3년 산 노하우(?)를 발휘했습니다. 어느 5평 남짓한 중국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곳은 동대문 광장시장 상가에 배달만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는 봉급 필요 없고요. 밥만 먹여주면 여기서 일 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배달도 할 수 있어요"
역시 베테랑은 뭔가 다릅니다. 친구는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갑질 행셉니다.
일손이 달렸던지 사장은 약도를 그려주며, 가방은 가게에 두고 자장면 3그릇 배달하고 오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친구와 난 건너편 보령약국 골목에서 자장면을 다 먹어 치웠습니다.
"니 가방에 뭐 들었나? 그거 포기하자“
쌀쌀한 초겨울, 어딘지도 모르는 골목에서 웅크리고 잠을 잤습니다.
다음날 그 친구 먼 친척이 운영하는 필동 동국대학교 앞에 있던 합지공장을 찾아갔습니다. 조그만 창고 같은 곳에서 내 또래의 아이들이 라면박스 같은 골판지에 회사 라벨이 붙은 종이를 열심히 붙이고 있었습니다. 먹여주고 재워준다는 것과 월급이 있다는 건 행운이었습니다.
먹여 주는 것이래야, 어린 직원들이 새벽 5시쯤 곤로에 불 피우고, 큰 양은 솥에 쌀 안치고, 중부시장까지 걸어 50원 단위로 판매하는 김치와 장아찌, 찌개거리를 사 취사를 하는 것이었고, 재워 준다는 건 공장 바닥에 박스를 깔고 깔깔이 비슷한 이불을 덮고 자는 것 이었습니다.
저녁때쯤 신사용 가방을 들고 언덕을 내려오던 젊은이들, 그들이 동국대학교 학생이란 건 나중에 알았습니다.
배신이란 걸 배웠습니다
당시 내 월급은 4천원이었습니다. 합지 주문이 얼마나 많던지 그해 설날엔 고향에 가지 못했습니다.
"보너스 줄테니, 이것 마치는 대로 고향들 다녀와라“
머리 좋은 사장은 도급을 제안한 겁니다. 모두 고향 가겠다는 생각에 이틀간 밤을 꼬박 새워 마무리를 했습니다.
"니는 성실하고 착하니까 보너스 외에 2천원 더 준다. 대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그레이."
작업이 다 끝난 다음날 보너스에 대한 기대감과 고향 간다는 설레임에 들뜬 나를 사장님이 조용히 불렀습니다. 순간 마음속으로 이 분을 위해 모든 걸 다하겠다는 맹세를 했습니다.
1개월 봉급과 보너스로 받은 2천원, 사장이 남몰래 더 준 2천원. 8천원을 꼭 쥐고 중부시장에서 내 구두와 어머님 스웨터를 샀습니다. 구두를 샀던 건 어머님께 ‘난 서울에서 잘 산다’는 모습을 보여 드리기 위함이었고, 스웨터는 지난 추석 때 뵌 어머님이 낡은 군용점퍼를 입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 '나에 대한 사장님의 특별 배려'에 내내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러게 잘사는 집에 태어나지. 왜 못난 어미 만나서 중학교도 못 가고..."
2일간의 휴가. 어머님은 내가 서울로 돌아갈 때마다 우셨습니다.
"걱정 마세요, 사장님이 얼마나 잘해 주시는데, 보너스도 2천원이나 더 주셨어요!"
복귀한 공장 분위기가 이상했습니다. 그때 동료 직원이 내게 조용히 물어본 말이 "니 명절 보너스(2천원) 외에 얼마 더 받았노?" 였습니다. '이 친구는 사장님이 안주셨구나!'란 생각에 못 받았다고 했습니다.
"다 4천 원씩 더 받았는데, 닌 왜 못 받았는데?"
그때 알았습니다. 왜 사장님이 내게 2천원 더 주며 동료 공원들에게 말하지 말라했던 것을, ‘촌티 못 벗은 저놈은 2천원 줘도 감지덕지 할 거’라고 생각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새벽에 밥하고, 반찬 사오고, 청소하는 당번제도가 싫어 도맡아 했을 정도로 멍청했으니 말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무식인기라!
16살 어린 마음에 더 그곳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공장을 나와 국도극장 옆 직업안내소를 찾았습니다. 직업을 한번 소개받는 비용 4천원. 어머님께서 배곯지 마라며 주셨던 돈이 있어 가능했습니다.
신림동 어느 작은 합지공장. 직업안내소에 합지공장을 부탁 했던 건 지금까지 해 오던 일이라 수월할 것 같았고, 경력사원(?)이라 월급도 2천원 많은 6천원 준다는데 망설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한 달 한번, 셋째 주 일요일에 쉬는 게 일반화 돼 있던 시절, 야근은 필수였습니다.
이상한 일은 사장이 어떤 한 녀석에게만 야근을 시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쟤는 사장 친척쯤 되나보다'로 치부해 버렸습니다.
"너 사장님 친척이지?"
"니 국민학교 나왔나?"
그 친구는 내 질문에 대답 대신 오히려 엉뚱한 걸 물었습니다.
"닌 국민학교 6학년이라도 졸업했재. 낸 국민학교 4학년 중퇴다."
평소 말이 없던 그 친구는 자신의 처지를 말했습니다.
"내 고향은 부산인데, 엄마가 집을 나간 기라. 공부가 얼마나 하고 싶었겠노, 아버지가 엿장수하며 주워온 책들을 모았다. 그걸로 국민학교 검정고시, 중학교 검정고시, 고등학교 검정고시 했다. 예비고사 봤는데 240점 맞았다. 고려대 법대 가려고 본고사 쳤지. 근데 떨어졌다. ○○학원 원장님이 공짜로 학원에 다니게 해서 서울 올라왔다. 이 공장 사장님이 ○○학원 원장님 친구인기라.”
야근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내 불만을 안 다는 듯 그 친구가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뭔지 아나? 무식이 젤 무서운 기라..."
모험을 하기로 했습니다
검정고시란 제도를 알았습니다. 청계천 헌책방에서 중학교 완전정복과 완정학습이란 교재를 그 친구가 일러준 대로 샀습니다. 매일 밤 12시까지 이어지는 잔업, 공부할 여건이 되지 않았습니다.
공장을 그만두고 신문배달을 시작했습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400여부의 신문을 돌리면 아침 7시. 오전 9시부터 신문 확장과 수금 등을 위해 밖으로 다니다 저녁 7시에 검정고시학원에 가면 매일 졸기 일쑤였습니다.
신문 보급소엔 월급이 없었습니다. 한 달 신문 구독료가 600원. 1부당 50원이 내게 떨어지니 학원비를 벌려면 확장(비독자를 독자로 만드는 일)은 필수였습니다.
"어머님 저 중학교 졸업했어요. 이게 졸업장이에요“
18살 때 중학교 검정고시 합격. 내가 내민 검정고시 합격증이 사라질새라 꼭 쥐고 보시던 어머님은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하셨습니다.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수차례에 걸친 실패. 그때 정말 힘들었던 건 어려운 수학문제 풀이가 아니라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며 놀고 싶은 유혹이었을 겁니다.
수차례의 과목합격(60점 이상은 과목합격으로 인정해 줍니다)을 거쳐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했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입대했던 군대
21살, 군대를 가기위한 신체검사를 받기 전 받은 서류 최종학력 란에 '고졸' 이라고 썼습니다.
'2급 갑종 현역병 입영대상!'
대학 가겠다는 계획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친구 말처럼 최종학력 란에 '국졸'이라고 썼어도 군대 안 가는 건데 괜한 자존심 때문에 입대를 하게 된 겁니다. 당시엔 전산이 체계화되지 않아 실제 학력(국졸)을 기재해도 넘어갈 수 있었던 시절입니다.
남들 장기 둘 때 공부하고, 남들이 축구할 때 공부하자 란 각오는 입대 후 바로 포기했습니다. 지금도 제일 싫어하는 단어가 ‘집합’입니다. 뭔 구타와 기합이 그리 많던지. 단체 생활이라곤 초등학교와 공장생활이 전부인 내게 군 생활은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의 연속이었습니다.
----- 여성분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군대, 축구얘기라기에 생략합니다 -----
1985년 2월. 정확히 30개월9일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전역했습니다.
군대 덕분에 공무원시험 합격하다
환갑을 눈앞에 둔 어머님은 약초를 캐시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나이 살이나 먹은 놈이 집에 처박혀 진학을 위한 공부를 한다는 건 견디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우리 꿈을 크게 갖자. 행정고시 해보자!"
군대 동기 녀석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폼 날 것 같았습니다.
계속되는 실패. ‘더 이상 시험모독죄는 짓지 말자, 언제까지 어머님을 고생시킬 건가!’
스스로 타협은 길지 않았습니다. 4년 만에 방향을 돌려 9급 공무원을 택했습니다. 29살 때 일입니다.
1989년 3월, 9급 공무원시험이 있었습니다. 끝까지 나를 괴롭혔던 과목은 수학이었습니다.
검정고시 수학점수도 60점 턱걸이로 겨우 합격했었는데, 군대에서 깡통이 돼버린 머리, 행정고시엔 수학과목이 없었습니다. 수학 손 놓은 지 10여년은 족히 됐을 겁니다. 인수분해 조차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응시지역을 강원도 정선으로 택했습니다. 정선을 택했던 이유는 딱 하나. 우리 마을사람들이 면사무소에 앉아있는 나를 보고 수군거릴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제 애미 고생시키며 몇 년동안 공부하더니...에게!’. 그렇지 않겠습니까!
운 좋게(?)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내 점수가 궁금해 강원도청 고시계를 찾았습니다. 여직원이 야릇한 미소를 보이며 과목별 점수를 적어 줬습니다.
왜 그 여직원이 웃었는지, 수학점수를 보고 알았습니다. 35점. 공무원시험은 평균이 아무리 높아도 어느 한 과목 점수가 40점미만이면 불합격입니다.
그런데 수학 35점인 내가 합격을 한 겁니다. 이유는 당시 현역병 제대자에게 주는 가산점 5점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으로 군대 다녀오길 참 잘했다 란 생각을 했습니다.
유명해 질지 몰라 '아호'를 만들었습니다
살면서 어려움이 있을 때 견딜 수 있었던 건 ‘이보다 훨씬 힘든 군 생활도 했는데’ 란 생각이 큰 힘으로 작용했습니다.
거나하게 술에 취했던 어느 날, ‘이 다음 내가 유명해 질지 모르니 아호(雅號) 하나 만들어야겠다’는 건방진(?) 생각을 했습니다.
즉흥적으로 만든 것이'나울(naul)'입니다. '나 그리고 우리(가 함께사는 세상 )' 란 다소 억지스런 뜻입니다. 누가 압니까! 내가 유명해지면 국어사전 한 모퉁이에 '나울'이란 단어가 등재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