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메달 Aug 18. 2023

나는 왜 미술관에 못 가는가?

미술관에서 서성이던 여자

우리는 왜 미술관에 못 가는가?     

‘우리는 왜 미술관에 가는가?‘라는 주제를 뽑아두고 몇 달이 지났다. 도무지 글을 쓸 수가 없는 것이다. 미술에 대한 기초 지식이 부족한가 싶어서 닥치는 대로 미술관 관련 책을 읽기 시작했다. 당연히 미술에 대한 기초지식 부족하다. 미술관 관련한 책을 예닐곱 권 읽었다. 그래도 미술관에 자주 갈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이런 증상이 계속되는 것인가 곱씹어 봤더니 미술은 나에게 너무나 먼 이웃나라 이야기였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미술을 제대로 배운 기억이 없다. 학창 시절 음악에 대한 수업은 작곡가 이름 외우기가 전부였다면, 미술 시간에 내가 배운 것은 음악과 마찬가지로 작품 보고 작가 이름이나 작품명 외우기가 전부였다, 작가가 인상파인지, 낭만파 인지 그런 것 외워서 작가의 사상이 무엇인지 객관식으로 연결하는 것이 미술 공부의 전부였던 것 같다. 우리는 왜 미술을 그렇게 밖에 배울 수 없었던 것일까.


초등학교 때 노란색 크레용으로 미리 바탕 그림 그려두고 그 안에 색을 채워 넣는 작업을 했던 기억도 있다. 가끔 미술 실기대회라는 이름을 붙여서 야외로 크레파스와 물감통 들고 체험 학습 나간 기억도 있다. 그 역시 지극히 형식적이었다. 그나마 그런 체험 학습도 시험기간이다 혹은 국영수 과목에 치여서 제대로 한 기억이 없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 중에 미대 가는 친구들은 그냥 집이 부자인 특별한 친구들이었다. 단순히 대학 가는 방법의 한 부분으로 봤다. 물론 미술적 재능이 있어야 미대 가는 것은 맞다. 그러나 지금처럼 재능보다는 미대 공부할 수 있는 집안의 재력이 더 우선적이었던 부분, 분명히 있었다. 그렇게 내 안에 미술은 전혀 들여다볼 수 없는, 뛰어넘을 수 없는, 남의 고급스러운 취향이거나 재능이었다.      



미술이라는 영역에 그래도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마흔 넘어서 ‘구스타프 클림트’의 노란색 그림 ‘키스’를 보고 난 이후부터였다. 마흔 전에 누가 미술관 간다고 하면 그저 참 고상한 취미를 가졌구나,라고 생각했을 뿐 내가 미술관을 선뜻 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다. 그렇다고 그동안 미술관을 한 번도 안 가 봤다는 아니지만 그만큼 문외한이었다는 소리이다. 가 봐도 별 감흥이 없었고, 감동도 없었다. 아이 육아할 때 주변에 좀 있어 보이는 선배들이 아이를 데리고 미술관을 많이 가 봐야 한다,라고 했을 때도 왜 그래야 하는지 잘 몰랐다. 사실 돌아다보면 아이 어릴 때 미술관 가주 못 가 본 것이 제일 후회되고, 아이에게도 미안하다. 뭘 알아야 가 보는 것이지.      



구스타프 클림트 그림이 제일 비싸다고?

다시 돌아와 ‘구스타프 클림트’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명함지갑으로 혹은 손거울로 돌아다니는 그 ‘키스’의 그림이 참 강렬했다. 사실 그림이 유명한 작품인지도 몰랐고, 그 작품명이 키스인지도 몰랐다. 그냥 보고 있으면 그게 참 강렬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병원에서 대기하면서 우연히 미술 관련 두꺼운 책을 보게 되었다. 그 책 안에서 또 ‘키스’의 그림을 아주 큰 인쇄체로 보게 되었다. 그 느낌은 아주 강렬했다. 그 책에서 키스의 그림 가격이 책정되었는데 정말로 큰 금액이었다. 그림이 작품이 되는 순간, 이렇게 가치는 엄청나는구나, 하는 찰나적 생각. 도대체 이것이 무엇인데 이렇게 비싼 그림인가, 하는 호기심. ‘구스타프 클림트’에 대한 궁금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렇게 구스타프 클림트는 내 안으로 들어왔다.     



후에 구스타프 클림트 관련 자료를 조금 더 읽게 되었다. 《방구석 미술관》을 쓴 조원제 작가는 구스타프 클림트를 “미술계의 제임스딘이라고 불러도 좋을 ‘희대의 반항아’였”다고 했다. 작품에 로맨틱의 아우라가 풍기니 세상없이 달달한 품성을 가졌을 것이다,라고. 나도 그렇게 상상하기도 했는데 희대의 반항아라니. 이렇게 작가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읽기 시작하니 그림에 대한 여러 감성이 살아나기 시작했다고 할까. 비로소 그림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림을 전혀 모르던 내가 그의 정원 시리즈 그림을 내 책상에까지 올려두는 광팬이 되었다. 왜 우리는 미술을 학교 때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까. 학창 시절 미술은 왜 작가 이름 외우는 것으로만 한정했을까. 아닌가? 내가 미술 시간에 아예 졸고 있어서 제대로 못 배웠을까. 수업 시간에 그렇게 조는 유형은 아니었다는 기억은 왜 나는 것일까.      





프리다 칼로에서의 몰입

그다음 눈독을 들인 작가가 ‘프리다 칼로’였다. 구스타프 클림프와 프리다 칼로 작품이 내 눈에는 비슷하게 보였다. 여전히 미술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는 무식의 소치이다. 서울 올림픽 공원 내 소마미술관에서 프리다 칼로 전시회를 한다고 할 때 내 생에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혼자서 전시회를 갔다. 온전히 즐길 마음을 품고 그림 전시회를 간 것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화가에 대하여 조금씩 알기 시작하니 무섭게 몰입하는 그 무엇이 있어서 참 행복했다. 프리다 칼로 관련한 자료를 몇 권 읽고 마음의 무장을 하고 그렇게 전시회를 갔던 기억이 난다. 아는 만큼 보이기 시작한다는 말이 딱 맞다.      




그렇게 몇 명의 작가를 접하고 아니 작품 공부를 일부러 하고 나니 미술관이나 전시회 가는 것이 조금 수월해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공연장 가는 것만큼 미술관 문턱이 낮아졌느냐, 그렇지는 않다. 여전히 어렵다. 여전히 버겁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무슨 계기가 있어야 미술을 들여다본다는 것이다. 여행지의 한 부분으로 강원도 양구의 ‘박수근 미술관’을 가 본 후로 박수근 작가의 세계관을 들여다본다든지, 대전의 ‘이응노 미술관’이라는 이름을 보고 이응노 작가를 들여다본다든지, 도시재생 관련으로 일본 연수를 가서 ‘이우환 미술관’을 건축의 한 축으로 보고 자료를 들여다본다든지, 달항아리 자료를 찾다가 ‘김환기’ 작가를 접한다든지... 언제나 이런 형식으로 미술을 접했다. 미술을 우선적으로 들여다보기 위하여 그림을 접한 것이 아니고 다른 장르를 들여다보다가 그렇게 연결된 한 부분으로 그림을 접했고, 미술을 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기는 하다.




습관적으로 의식적으로 그림을 보다

나이 들어서 조금이나마 그 세계를 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주변의 여러 변화들도 한몫했다. 백화점에서 자연스럽게 풀어 둔 갤러리라든지 대중적인 메시지를 담은 미술관 단행본이라든지. 《방구석 미술관》을 쓴 조원제 작가나 《예술적 상상력》을 쓴 오종우 작가 같은 분들이 있어서 미술적 영감을 조금을 익히게 되었다. 아주 멀리에서만 있던 미술을, 그림을, 덕분에 조금씩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들을 거치면서 신예 젊은 작가들의 그림도 의식적으로, 습관적으로 그나마 좀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니 우리가 미술관을 가는 문턱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다.      



김환기_달항아리와 매화가지

   

미술작품 훼손

2021년 러시아 초대 대통령 보리스 옐친 기념관 ‘옐친 센터’에 걸린 그림에 경비원이 ‘안나 레포르스카야’의 ‘세 인물(Three Figue)에 검은색 점을 그려 넣은 경우도 있었다. 근무 도중 지루해서 볼펜으로 눈을 그려 넣었다. 보험금만 천문학적인 숫자인 작품인데, 단순히 심심해서.      



우리나라에도 이런 경우 있었다. 경주 솔거미술관 내 박대성 화백의 작품에 부모와 방문한 아이가 작품 위에 신발을 신고 다니면서 작품을 훼손했다. 이 역시 억대 피해를 입혔다. “아이가 그럴 수도 있다”라고 박대성 화백은 문제 삼지 않았다. 같은 해에 롯데월드몰 지하에 설치된 존원의 작품 ‘무제(Untitied)'에도 참여형 작품이라고 판단한 어느 연인들이 페인트로 덧칠을 하여 작품을 훼손한 일이 있었다. 작품이 유명하다, 안 유명하다를 떠나서 잘 모르면 그럴 수도 있다, 혹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로 서로 주장을 내세울 수 있다. 낙서가 발전하여 예술이 되기도 한다,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청소년 예술캠프에서

몇 년 전 지역에서 예술캠프를 진행한 적 있었다. 청소년들과 문화예술 관련한 주제 아래, 체험과 탐방을 같이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때 청소년 70여 명을 한꺼번에 데리고 미술관 관람을 했는데 입장하자마자 사고가 났다. 지금도 아찔하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청소년 참여자가 미술관 벽에(작품이었나), 매직으로 선을 그었다. 너무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할 찰나에 나는 본능적으로 소리 질렀다. “하지 마” 그 소리에 놀라서 아이는 울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내 눈앞에서 벌어진 사고였는데도 불구하고 그 아이는 “내가 안 그랬어요”하고 우는 것이었다. 후속적인 수습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휴.   



나는 이런 부분을 다시 미술 교육의 부재로 해석하고 싶다. 대부분 미술관에 가면 “눈으로만 보세요”, 혹은 “만지지 마세요”라고 안내문이 있다. 그럼에도 그런 안내문을 자세히 안 보거나, 봐도 무슨 상관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학창 시절 국영수 보다 낮은 비중을 차지했던 미술과목이 미술관에서도 역시나 제대로 된 환대를 못 받는 것이다. 물론 미술 작품 애호가들은 당연히 택도 없는 소리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어쩌냐. 우리들 일상에서, 우리들 생활에서 미술은 언제나 개인적 취향으로 고상한 취미로만 자리매김하고 있으니.    


  

우리는 왜 미술관을 못 가는가. 이 원인을 조금 더 근본적인 것에서 들여다볼 수는 없을까. 일상에서 우리가 많이 못 접한 것에 대한 버거움, 낯섦이 미술관을 쉽게, 편하게 못 가는 것은 아닌가. 가서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이래저래 불편한, 혹은 조심해야 할 공간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매거진의 이전글 문화자본의 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