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염라대왕과 삼신할머니를 직무유기죄로 고소한다.

습작의 창고

by 나바드

한 움큼의 약을 삼켰고, 숨이 멎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염라대왕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너는 이제 이승의 삶을 끝냈다. 49일간 너의 죄를 심문하고, 그 결과에 따라 너를 지옥과 극락 중 하나로 보낼 것이다.”


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그의 말을 들었다.

초점 없는 눈빛, 무기력, 집중하지 못하는 상태.

죽음 이후에도, 나는 그대로였다.


염라는 내 모습을 보며 화를 냈다.

“네가 지금 저승에 와서도 이승에서의 껍데기를 벗지 못하느냐?”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조용히 물었다.

“신은 존재합니까?”


그는 대답했다. “지금 이 순간,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네 존재 자체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증거 아니겠느냐.”


나는 다시 물었다.

“삼신할머니를 불러 주시겠습니까?”


염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노인은 괜히 불렀다가 핀잔만 들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러면서도 내 마지막 요청이라며, 결국 들어주었다.


얼마 뒤, 삼신할머니가 나타났다.

입에 욕을 달고 “바빠 죽겠는데 왜 불렀냐”며 염라대왕을 향해 호통을 쳤다.


그러나 나를 보자마자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 얘. 내가 너 점지했지.

서른 해 전쯤 됐을 거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를 점지하셨을 때, 행복하셨나요?”


삼신할머니는 말했다.

“모든 아이를 점지할 때는 행복하단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잠시 멈췄고,

곧 분노가 일었다.


“사람의 생명에는 귀천이 없습니다.

하지만 다 큰 성인이 스스로 선택한 결과로 병을 얻는 것과, 태어나자마자 이유도 모른 채 병과 고통을 짊어지는 아이는 다릅니다. 그 아이는 도대체 어떤 선택과 어떤 의지로 그런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까?”


염라대왕과 삼신할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조용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인간은 감당할 수 있는 고통만 받는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매일 저는 그 말에 되묻습니다. 왜 누군가는 태어나자마자 죽음보다 아픈 삶을 살아야 합니까?

삼신할머니가 던진 주사위 하나로, 누군가는 축복을, 누군가는 지옥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어떤 이는 타인을 돕고 세상을 이롭게 하고도 일찍 세상을 떠납니다. 신들이 그를 필요로 해서 데려간 거라고요? 그건 위로가 아니라, 책임 회피입니다.


반면 누군가는 사람들을 괴롭히고도 장수합니다.

그 삶의 균형을 도대체 누가 설계했습니까?


그리고 또 어떤 위인은 말했죠.

‘성공은 99%의 노력과 1%의 영감이다.’

하지만 그 1%가 결국 ‘재능’이라는 타고남이라면,

그 말을 다시 번역하면 ‘재능 없는 자는 성공하지 못한다’는 선언일뿐 아닙니까?


그들은 나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없었다.

이승에서 내가 늘 짓던 멍한 눈으로,

이번에는 그들이 나를 똑같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기소하기로 결심했다.

염라대왕과 삼신할머니를 직무유기죄로 고소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철학적 죄목들도 함께 적용했다.

1. 확률 남용죄

아이의 운명을 복권처럼 확률로 결정한 죄.

누군가는 왕가에 태어나고, 누군가는 절망 속에서 태어난 세상을 설계한 죄.


2. 무차별 창조죄

자신이 돌보지 못할 생명을 끝없이 점지한 죄.

사랑받지 못할 운명을 태어나게 하고도 책임지지 않은 죄.


3. 선악불구분죄

권력자와 살인자, 학대자와 피해자를

같은 저울로 심판해 온 죄.

정의의 탈을 쓴 방관, 그것은 정의유기다.


4. 존재의 방치죄

고통받는 아이들의 비명 앞에서도

아무 일 없다는 듯 또 다른 생명을 점지해 온 죄.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방치.


5. 고통의 외주화죄

삶의 무게는 인간의 몫이고,

신은 그 책임에서 벗어난 구조를 설계한 죄.

고통을 외주 주고, 응답하지 않은 구조의 죄.



그리고 나는, 저승법 제47조 ‘신의 직무와 책임에 관한 조항’, 제72조 ‘신들의 죄에 대한 공동 심판 규정’에 따라 정식으로 그들을 저승 재판정에 세웠다.


49일간의 심판을 주관하는 시왕들과,

100일, 1주기, 3주기를 담당하는 열 명의 재판관 중 과반이 참여하고, 과반이 찬성한다면 신이라 해도 죄를 면할 수 없다는 ‘저승법_신들의 죄에 관한 조항’에 따라 나는 염라대왕과 삼신할머니를 기소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사후 49일의 심판이

그들을 향해 시작된다.


1심, 7일째 – 진광대왕

2심, 14일째 – 초강대왕

3심, 21일째 – 송제대왕

4심, 28일째 – 오관대왕

5심, 35일째 – 염라대왕

6심, 42일째 – 변성대왕

7심, 49일째 – 태산대왕

8심, 100일째 – 평등대왕

9심, 1주기 – 도시대왕

10심, 3주기 – 오도전륜대왕


재판의 결과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몫이다.

무엇이 죄이며, 무엇이 불의였는가.


그 판단은 신이 아닌,
당신의 생각이 곧 판결문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설계도 위의 삶, 한국에서 파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