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서 있는 곳을 다시 생각하다.
필 로드, 크리스 밀러 감독의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
외계인이 지구인을 도와서 뭘 어떻게 한다는 거야?
반경 몇 킬로미터 안의 집과 직장과 만나는 사람들이 소복이 복닥거리는 소우주에서의 나는, 매일이 뱅글뱅글 바쁘다. 늘 비슷한 옷을 입고 거의 같은 곳을 달려 집과 직장 오간다. 매번 새롭다 하기에는 반복적인 일을 쳐내느라 바쁜 하루의 일상을 보내고 오면, 똑같은 주방과 식탁에서 밥 끓여 먹고 조금의 운동을 하는 날도 있고 못하는(안 하는) 날도 있는. 별 볼 일은 없지만 단 한 가지도 무시할 수 없는 일상으로 온건한 쳇바퀴 안에서 안도의 이불을 덮고 잠에 든다. 나는 언제나 나의 세계에서 바쁘므로, 세상 바깥의 것들에게 눈 돌릴 틈이 없다고 생각하며 산다. 어쩌다 수도 서울에서 일어나는 일과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말을 얹는 정도로도 이 세상에 제법 많은 관심을 갖고 산다고 생각한다.
광활한 우주, 심연의 바다. 나에게 이런 끝없는 공간에 대한 공포감은 내가 살고 있는 '한정된' 것에 대한 안정감을 무너뜨리기에 좋은 소재다. 그래, 나는 별 관심이 없다. 우주에 대해서는. 지구도 속 시끄러운데 우주라니.
그런데 조금만 골똘히 생각하는 날이면 어마어마한 우주에서 매우 작은 은하계인 태양계 안에서 손톱보다도 더 작은 지구라는 반짝이는 별 안에, 2미터도 안 되는 크기로 중력의 지배를 받으며 하루하루 꼬물거린다는 것이. 약간 기가 찬다. 이런 글을 쓰는 것도 현실감이 없다.
우주를 생각하면 드는 생각.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비행기를 타고 상공 위에만 올라가도 인간의 머리꼭지는 보이지도 않는데.
우주를 생각한다는 것이 의미가 있나. 이 모든 것들을 무쓸모로 만들어버리는 너무도 광활한 공간.
앞뒤도 없고, 시작과 끝도 없고, 선형과 비선형도 인정하지 않는, 시간도 흐르지 않고 공간이 정체된,
인간사회의 어떤 상식도 통하지 않는 그곳에, 인간이 어떻게 무슨 일을, 인간으로서의 인간됨이라는 것이 가능할까.
나는 우주라는 공간에 대해, 여전히 만나지 못한 허구로만 인식한다. 나는, 그렇게 편협한 인간이므로. 나는 나의 밥벌이에 연연하다 채 백 년을 못살고 꺼질 나약한 촛불일 테니까.
별 기대 없이 영화관에 가면서도 남편에게 묻는다. 아니 그래서 영화 제목이 뭐라는 거야?
한심한 얼굴로 나에게 대답한다. 이 영화를 보자고 먼저 말한 건 당신이었어. 그런데 영화 제목을 몰라?
멋쩍은 듯 웃으며 다시 대답한다. 크큭. 미안. 봐야 하는 영화였어. 그렇지만 당신도 보고 싶다고 했잖아.
영화표를 내밀며 영화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는 남편은, 별 기대는 없다는 듯 심드렁했다. 그런데, 영화 평이나 여기저기 들리는 이야기로는 아이맥스로 보는 게 좋대.
나는 이 영화로 내가 서 있는 곳의 좌표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목숨을 걸고 우주여행을 할 용기 있는 인간은 없다. 그러나 어떤 순간 발현되는 인간의 용기는 본능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것보다 생명은 더욱 고귀하고 강인하며, 생명은 생명 그 자체의 존재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도록 설계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나를 나라고 인식하는 것도 이 생명이 꺼지지 않게 하기 위한 장치는 아니었을까. 그리고 어떤 생명체가 모두 우리처럼 직립보행을 하고, 인간의 형태처럼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 즈음은 영화를 보지 않아도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았을까.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체가 이 지구상, 이 우주상에는 뭘 상상하든 그것보다는 훨씬 많을지도 모르겠다는 것도.
영화는 관념을 넘어선 미래를 미리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미 훌륭했다. 깜깜한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사실상의 주인공 1인이 모든 러닝타임을 독식하듯 하는 이 외로운 여정이 지구나 우주나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했으므로. 관념이 아닌 현재와 미래는 이미 같은 시간에 우리에게 와 있다는 것도. 우주에서의 인간의 삶은 중력이 작용하지 않고 방사선에 피폭될 수 있다는 것 정도로 우주는 인간의 삶은 그 자체로 무너지는 것이리라 상상했던 내 관념은 블랙홀에서 길을 잃었다.
인간의 문명보다 더 발달한 외계인은 없을 거야.
왜?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지구에 왔을 텐데. 한 번도 온 적이 없잖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예전에 했던 무지했던 나의 저 대화는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영화로 알았다. 인간의 문명을 다른 행성의 무언가와 비교하여 우열을 가리고 싶었던 인간의 마음이 인간의 열등감이라는 것을 말이다. 외계인을 두려워했던 것은 인간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누구든 안다, 자신의 나약함을. 그리고 또 안다, 나약함을 들키고 싶지 않다는 것을. 적어도 외계인은 우주인을 만나 '헤일메리(절박한 상황에서 던지는 기적 같은 패스를 뜻하는 미식축구 용어)'처럼 메시지를 던졌을 때, 나약해 보이지도 열등감에 가득 차보이지도 않았다. 산소와 중력이라는 환경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특징을 단번에 간파한(뛰어난 능력을 가진) 외계인은 (나약한) 인간을 파괴하려 하지 않았다.
인간은 영화에서 등장한 외계인처럼 몸이 광물로 이루어져있지도 않다. 몸에 털도 없어 체온유지도 쉽지 않다. 록키는 인간이 가지지 않은 능력이 있다. 인간보다 발달하지 않은 부분도 있다. 너무도 당연하게 생명체는 자신이 사는 공간에 적응하며 그 분야를 발전시킬 뿐이다. 심해어(深海魚)에게 눈이 발달하지 않았다고 해서 열등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스스로의 열등감을 감추려 상대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닐까. 겁이 많은 개가 매섭게 짖는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외계인이 스스로의 몸이 타들어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몸을 던져 지구인을 살리려 하는 장면에서 나는 오열하고 말았다.
외로운 자기만의 세계에서 오래 버틴 생명체는 본능적으로 안다. 외로운 그 길을 가는 또 다른 생명체가 죽지 않길 바라는 마음, 나는 그 지점에서 모든 생명체가 가진 숭고함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죽지 않길 바라는 마음은 외계인의 생명 그 자체이다. 잠드는 지구인의 곁을 지키는 외계인의 끈질긴 생명 그 자체일 것이다. 나는 외계인이 우리가 말하는 통상적인 '인간미'를 갖추었길 바라지 않기로 한다. 나는 '인간미'도 다른 행성의 생명체가 보았을 때 그저 낯선 생명체의 또 다른 특성일 뿐일지도 모를 거라 생각한다. 인간미로 인간임을 우쭐댈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특징을 지녔을 뿐이다. 그래서 내가 서 있는 좌표가 기준점은 아닐 것이다. 나는 큰 좌표의 구석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대체로 좋아하지 않는 어떤 생명체의 모습도(이를테면 바퀴벌레나 아메바 같은 것들) 나의 좌표가 기준점이길 바라는 인간의 이기심일지 모른다. 멀고 먼 우주에서의 여행, "아스트로파지"라는 생명체와 그를 먹어치우는 천적 생명체 "타우메바"를 찾아 낯선 행성으로 가는 길. 우주선이 타들어가고, 인간의 신체로 절대 들어갈 수 없는 중력을 지닌 행성의 대기권 앞에 펼쳐진 화면은 황홀하리만큼 몽환적이었다. 인간으로서 혐오스러워야 할 생명체가 군집한 형상 앞에 느끼는 몽환의 감정을, 인간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생명의 끝없는 집착 앞에서도 감상과 감정에 젖어드는 인간의 그 마음을, 동행했던 외계인은 이해했을까. 나는 우주인과 외계인이 이미 감정적으로 이어져 있길 바랐다. 외계인과 헤어질 지구인의 다음 장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외계인은 인간과 비슷한 감정일 것이라는 나의 욕심은 영화의 다음 장면보다 미리 우주로 날아가고 있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냉정하게 생각을 해보기로 한다. 함께 음악회에서 말러의 교향곡 5번 4악장을 들었을 때, 나의 감상을 남편이 이해했을까. 나는 남편을 이해했을까. 우리는 때때로 외계에서 산다. 그리고 때때로 외계인과 소통한다. 외계인이 아니길 바라면서.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는 제법 오래 울었다.
어느 순간, 무엇 때문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어 혼란스럽게 울었다.
내 눈물은 중력이 없는 우주, 그리고 은하계 밖의 낯선 행성 '타우세티'에 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여 유튜브로 들어가시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다른 경로로 감상이 되지 않도록 설정된 영상이네요.)
https://youtu.be/kLotLkMPuWU?si=7V8ItLDf9Vh5XpI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