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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미스럽게 Dec 16. 2021

국민학교

추억의 교실

일상 속 소소했지만 이제는 그리운 추억이


의무 교육의 초등 과정은 1995년도까지 '국민학교'로 불리었다. 난 80년대 국민학교란 곳에서 배우며 자랐다. 나무 바닥으로 된 교실은 여닫이 뒷문으로 들어가면 빼곡하게 들어찬 2인용 초록칠 책상과 1인용 나무의자, 커다란 초록빛 칠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땐 한 학급에 학생이 50명이 훨씬 넘었다.


국민학교 명칭은 1941~1996년까지 사용되었다. 최초 초등교육기관이었던 소학교는 갑오개혁 이후 근대화 시기에 생겨났다. 1906년 8월 27일 보통학교령에 의해 소학교가 '보통학교'로 바뀌고, 일본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는 보통학교와 구분을 위해 '소학교'라 칭했다. 1926년 7월 1일, 소학 교령에 의해 '심상소학교'로 통합되고 이후 1941년 일제 칙령 제148호 '국민학교령'에 의해 국민학교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는 황국신민을 양성한다는 일제강점기 초등교육정책을 반영한 것이었다. '국민학교'라는 명칭은 나치 독일의 전체주의 교육, 폴크스 슐레(Volksschule)를 상징한다. 교육부는 광복 50주년을 앞두고 1995년 8월 11일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의 얼을 바로 세우기 위해" 국민학교의 명칭 변경을 발표한다. 1996년 3월 1일, 국민학교는 지금의 '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뀐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지금의 초등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 시절, 책상의 중앙에는 누군가 날카로운 도구로 그어놓은 듯한 금이 그어져 있었는데, 세월의 흔적이라 여러 사람이 시기마다 그어서인지 제법 골이 깊게 새겨 있기도 했다. 주로 남녀 학생이 짝이 되어 앉았다. 한 번씩 다퉈 마음이 틀어질 경우, 책상 가운데 줄을 그어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경고 표시였다. 어릴 적 교실을 추억하며 떠오르는 하나의 색깔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당연히 초록빛이다. 그린 책상, 커다란 직사각의 녹색 칠판, 교실 뒤 놓인 식물들. 초록 빛깔이 주는 안정감은 아마 학생들을 배려한 의도된 컬러 조성이었으리라 생각해본다.



칠판 닦기는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번들의 주된 임무였다. 아들에게 물었더니 지금의 초등학생들은 주번을 '1인 인력'이라고 한단다. 좀 딱딱하긴 하지만 전문성이 고려된, 한층 세련되고 급이 높아진 표현이다.  고급화된 인력을 존중하는 표현으로 느껴진다. 어릴 적 국민학교의 당번은 식물에 물을 주기 위해 주전자에 물을 떠 오는 임무도 있었고, 선생님의 잔심부름과 수업이 끝난 뒤 흐트러진 책상과 의자 정리도 해야 했다. 그날의 학급 일지를 체크한 후에야 가방을 메고 비로소 하교할 수 있었다.


칠판 지우기. 수업이 끝날 때마다 두 명의 당번이 함께 혹은 번갈아가면서 담당했다. 키가 닿지 않은 칠판 위까지 지우려면 점프하듯 토끼뜀을 뛰며 칠판 글씨를 지워야 했다. 그래도 해결되지 않은 칠판 글씨는 의자를 가져와 키높이를 칠판 위쪽과 어느 정도 맞춘 뒤에라야 칠판 지우기는 끝이 났다. 도중 하얗게 일어나는 반달 모양이 칠판에 나타나는 건 분필가루를 과식한 칠판지우개 때문이다. 번거롭더라도 중간에 한 번 더 털어줘야 한다. '텅텅 텅!' 분필 가루를 피하느라 고개를 교실 안으로 향해 돌리고 창밖으로 팔을 최대한 쭉 뻗어 두 개의 마주 보기 중인 칠판지우개를 격하게 털어낸다. 한두 모금 분필가루도 마시는 건 덤이다. 교실마다 창밖으로 내민 어린 학생들의 팔과 탈탈거리는 지우개 털림 소리. 수업이 끝나고 저마다 들리는 지우개 터는 소리는 돌림 노래처럼 메아리가 되어 귓가에 울린다. 쉬는 시간 노느라 잠시 본분을 잊어버린 당번은 수업 시작 전,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시기 전까지 후다닥 칠판을 지우느라 허둥대며 손놀림이 바빴다. 그렇게 칠판지우개를 털고 나면 마음은 가벼워지고 다시 태어난 꽃은 칠판이다. 양 옆으로 기다란 칠판은 다음 수업의 예고편, 깨끗한 초록 꽃으로 피어났다. 연이어 수업 종이 스피커를 타며 울리고, 여닫이 교실 앞 문이 스르륵 열린다.  익숙한 담임 선생님이 다시 등장한다. 그렇게 다시 시작되는 초록빛 무대,  주연이 되신 선생님의 무대에 두려운 듯 집중하며 조용해진 60명에 가까운 학생석의 관중들은 호기심 어려 눈빛은 빛나거나 흔들리거나.



정기적인 조회시간. 매주 월요일마다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이 있었다. 간혹 시상식이 있기도 했고, 국민체조는 의무였다. 운동장 조회시간에 모인 전교생은 반별 기준 구호에 맞춰 줄 맞추기 하느라 일제히 손을 앞으로 뻗어 반마다 각 잡기에 분주했다. 건조한 날이면 전교생의 움직임에 흙바람이 일기도 했다. 아빠의 근무지 따라  6학년 신학기에 전학을 갔던 학교에서는 해가 따가운 날 운동장 조회시간, 갑자기 어지럽더니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그대로 쓰러졌다. 유난히 햇살이 뜨거웠던 날이었다. 그 시절 나는 키가 큰, 빼 마른 여학생이었다. 양호실에서 가만  누워 안정될 때까지 잠시 쉼을 누렸다. 바깥 조회시간, 간혹 쓰러지는 친구들이 있었다.



잊히지 않은 국기에 대한 경례!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바로! 이어지는 애국가 떼창. 앞뒤 순서가 조금 헷갈리긴 하다.  음악시간에 '애국가 4절까지 외워 부르기'는 실기 시험이었다. 오른손은 명찰이 달린 왼쪽 가슴에 올려 선언이 끝날 때까지 유지했다. 노란색 명찰! 학년과 반, 이름이 까만색 수가 놓여 걸개 옷핀으로 겉옷에 고정하게끔 되어있다. 특히 등교시간에는 이름표를 달지 않으면 선도부에 걸려 주의를 받았다.

학교 정문을 통과할 즈음 스캔당하듯 선도부 언니, 오빠들 앞을 지날 때면 괜히 더 긴장이 되곤 했다. 국민학교 입학 때는 명찰 대신 손수건이 왼쪽 가슴에 걸렸다. 노란 콧물을 흘리던 코흘리개 친구들이 꽤 많았던 시절이다. 신동이라 소리 듣는 똑똑한 친구들은 다섯 살에 입학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같은 학년이라 호칭은 그냥 친구였다.


1, 2학년 때에는 구구단을 큰 소리로 외웠다. 교실에 학생들이 50명이 넘던 시절이었으니 그 소리가 오죽 클까. 외우기 집중시간. 복도에 흘러넘치는 건 역시 구구단이다. 그것마저 함께라서 좋았던 것 같다. 나무 복도 청소는 정해진 날, 학교 전체가 움직였다. 교실 복도 왁스 칠 청소는 학교 전체 행사처럼 행해졌다. 개인 준비물은 양초와 헝겊 걸레다. 전 날, 못쓰는 수건을 빼내어 엄마가 바늘과 실로 뚝딱 학교 청소에 쓰일 걸레를 만들어 주셨다. 복도를 윤기 나게 하는 건 준비해 간 하얀  파라핀 양초 하나면 됐다. 전 학생이 교실 옆 복도로 나와 정해진 구역에 진을 치고 초를 바른다. 앞으로 갔다 뒤로 돌아, 그렇게 왔다 갔다를 반복하다 보면 바닥은 어느새 윤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놀이와도 같았던 나무 복도 양초 칠하는 작업. 공부가 아니었으니 대청소는 놀이에 가까웠다. 복도를 닦고 나면 수건은 까맣게 변해 있었고, 복도는 어느새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간혹 손가락 어느 한쪽이 따끔거렸다. 신나게 놀다 보면 나무 가시가 손에 찔려 빠지기 전까지 걸리적거리는 통증은 떠안아야 했다. 걸을 때마다 종종 삐거덕 소리가 나는 구간이 있다. 나무 복도. 술래잡기하기에는 불리하다. 난 지금도 매끈한 시멘트 바닥보다 나무 복도의 기억 속 그 느낌이 더 좋다.


겨울철에는 연기 배출구인 긴 배관이 연결된 낡고도 갈색빛 찬연한 거친 난로가 등장한다. 철이 녹슬어 빈티지한 개성 넘친 난로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아날로그 시대에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감성이 묻어있다. 나무나 종이 땔감으로 난로에 불을 피우던 국민학교 시절. 타닥거리는 나무 타는 소리와 냄새.

어렴풋 떠오른 기억, 그 온기, 느낌, 지금 생각해보니 좋다. 학생 때와는 다른, 포근한 느낌이다. 일상 속 소소했지만 이제는 그리운 추억이 됐다. 보온 도시락이 없어 양철 도시락을 가져온 친구들은 선생님이 난로 위에 도시락을 올리게 하셨다. 도시락이 사라진 난로 위에는 선생님이 올려놓은 주전자만이 주연이 된다. 우리 모두 주전자의 따뜻한 수증기를 머금은 채 추운 겨울을 함께 견디었다.



점심을 먹고 나면 설레는 자유 놀이 시간이다. 아쉬운 것은 짧다는 점. 학교생활 중 미술시간 다음으로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게 좋았다. 밥을 막 먹고 뛰어서인지 이따금 배가 아파왔지만 견딜만했다. 여학생들은 술래잡기나 돌을 주워다가 공기놀이나 고무줄놀이를 했다. 시간이 짧았던 점심시간의 놀이는 제한적이었다. 항상 장난기 심한 짓궂은 친구들이 있기 마련인데 어디선가 남자아이들이 나타나 고무줄을 끊고 신나게 달아나곤 했다. 그게 재밌었을까? 최고의 관종 놀이를 즐긴 게 분명하다. 여분의 고무줄이 또 나타나면 운이 좋은 거고, 없으면 다른 놀이를 하면 되었다. 공기놀이를 한참 하고 나면 손톱에 흙이 끼어 있었다. 손톱에 때, 학교에서 정기적으로 하던 검사다. 무아지경 속 깔깔대며 집중하며 노는 사이 흙은 어느새 손톱 밑까지 자리했다. 놀이 시간의 끝판은 역시 하교 이후부터다. 학생 수가 많던 시절이라 오전, 오후 반이 나뉘어 수업이 진행되던 때가 있었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나면 해 질 무렵까지 친구들과 곳곳에서 마음껏 뛰며 놀았다. 오후 늦은 시간, 사이렌이 울리고 애국가가 울려 퍼졌던 무렵이었을까? 기억이 또렷하지 않지만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거리에 모든 사람들은 일제히 걸음을 멈췄다. 한 손은 왼쪽 가슴에 올려진 채, 애국가가 끝날 때까지 부동자세의 얼음 땡은 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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