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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미스럽게 Dec 15. 2021

친구야 노올자

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는 꽃이 되었다



친구들과 맘껏 뛰어놀 수 있는 기대감은 국민학교 하교 뒤였다. 집에 돌아오면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날 주어진 학교 숙제다. 무슨 영화 제목 같지만 엄마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 서둘러 숙제를 끝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대문 밖, 친구들의 날 부르는 소리! OO야, 노올자! 대답이 들리지 않는다 싶으면  더 큰 목소리로 “OO야, 노올자!” , 다시 목청을 뽑는다. 그때 그 시절, 친구를 부르는 데는 특유의 리듬이 있다. 한 명이 부를 때도 있고, 두어 명이 함께 찾아와서 떼창 하듯 부르기도 했다. 특별한 약속을 하지 않아도 친구 집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친구들이 내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난 활짝 핀, 한송이 꽃이 되었다. 어찌나 반가운 호출인지. 함께 놀기의 제안은 그저 각자의 이름을 정답게 불러 주면 되었다. 화답은 아마 ‘어, 나갈게!’, ‘기다려!’ 그 정도의 표현으로 목소리는 들뜬 하이톤이었을 것이다. 신발을 급히 주워 신고 후다닥 대문 밖을 나서면 생기 돋는 초록빛 들풀처럼 꾸밈없는 친구들의 얼굴이었을 것이다. 30년이 훨씬 지난 세월이다. 사실 그 친구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게 나를 기다리며 서있던 동네 친구들. 대문 옆, 초인종이 있긴 했지만 고장 난 벨도 흔했다. 우리들은 벨을 누르기보다 친구들의 이름을 불렀다. 나 역시 친구 집 대문 밖에서 친구의 이름을 목청껏 자주 불렀다. 때론 대답이 없을 때도 있다. 잠이 들었거나 친구의 부재를 그들의 가족이 대신 전해주기도 했다. 돌아오는 답이 없으면 다른 친구네 집 앞에서 또 다른 친구를 부른다. "OO야, 노올자!" 대개 밖에서 마음껏 뛰어노는 게 다반사였지만 때론 친구 집에서 놀며 밥까지 얻어먹곤 귀가하기도 했다.


©Clker-Free-Vector, 출처 Pixabay



놀이는 다양했다. 공기놀이는 동그랗고 작은 돌멩이들을 주워서 하면 되었다. 그야말로 굴러다니던 돌의 재발견이었다. 공기놀이는 한 알 주워 먹기부터 난이도가 올라간다. 두 알, 세 알, 다음 단계 넷까지 손으로 쥐기 성공하면 손등에 올린 돌의 개수만큼 낚아채 모은 수만큼 합하고 쌓인 숫자가 큰 사람이 이기는 놀이다. 나중 문방구에서 구입할 수 있었던 작은 색색의 공기놀이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저 길가에 돌을 주워서 놀면 됐다. 단, 모난 돌은 손등을 아프게 할 수 있으니 둥그렇고, 작은 돌을 모아야 했다. 역시 돌멩이조차도 모가 나면 안 되는 조건이 놀이에서도 적용된다. 돌멩이의 조건, 예외가 있었다. 칸을 긋는 도구로 사용할 돌의 경우는 모가 나있거나 흰색이나 색이 묻어나는 돌이 유용했다. 그렇게 돌을 주우러 다니다 보면 알알이 결정체가 모여 있는 신기한 돌을 발견할 때가 아주 드물지만 간혹 있기도 했다. 국민학교 시절의 공기놀이는 흙바람이 이는 땅이나 시멘트 바닥에서도 이어졌다. 구별하여 모은 공기놀이용 돌을 집안으로 들일 때는 물에 깨끗이 씻어야만 했다. 놀이를 통해 모난 의 쓸모를 구별하고, 깨끗해야 하는 이유와 여러 가지 경우의 수도 자연스레 터득했을 것이다. 인기 많았던 땅따먹기 놀이는 납작한 돌을 주워다가 흙바닥에 금을 그어 칸칸이 그려주면 된다. 깨금발로 한 발을 들고 깡총 뛰어 칸칸이 금을 밟지 않고 목적지까지 도달했다가 다시 출발지까지 되돌아오면 이기는 놀이다. 편을 짜 함께 협동하여 진행되는데 한 사람이 금을 밟으면 아웃! 상대편이 새롭게 시작하고 반환점 목적지에서 뒤돌아 돌을 던져 칸을 차지한 영역의 주인이 되는 놀이다. 전략적으로 두 칸, 세 칸의 자기 영역을 만들면 상대팀은 두 칸의 넓이만큼 있는 힘껏 뛰어넘어야  한다. 넘어지기도, 금을 밟기도 하지만 그저 재밌다. 다양한 상황에 맞게 목적 달성을 위한 심기일전의 제스처와 지략은 단순한 동심에서도 반짝 기지를 발휘한다. 놀이에서는 흔하게 ‘금을 밟는다’라고 표현했다. 칸칸이 그어진 선을 밟지 않고 나아가는 것. 그러다 넘어지거나 선을 밟게 되면 기회는 다시 상대에게 돌아간다. 비석 치기 역시 돌을 사용하는, 기술이 필요한 놀이다. 돌을 단계별로 어깨나 손, 무릎 사이, 겨드랑이나 목, 엉덩이 사이 납작한 돌을 들거나 끼우거나  머리에 이고 가다 목표지 상대의 돌을 쓰러뜨리면 이기는 놀이다. 다양한 기술을 부리 어릴 적 그때 놀이가 이제는 그저 우리들만의 전래놀이가 되어버린 것만 같다.  길가에 그저 굴러다니는 돌들의 다양한 쓸모를 몸소 체험한 건 흙먼지 이는 바람 속에서도 신나게 뛰어놀던 그 시절의 우리들 뿐일까?


©OpenClipart-Vectors, 출처 Pixabay



궂은날, 비만 오지 않으면 바깥 모든 환경이 그대로 놀이터였다. 밖에서 노는 게 싫증 나면 다시 집으로 장소를 옮겨 놀았다. 앞마당에서는 분필로 칸을 그어 땅따먹기 놀이를 자주 했다. 여자아이들은 종이인형 놀이도 흔했다. 동네 문방구에서 종이인형을 종류별로 여러 장을 사다 가위로 죄다 오리고 나면 손가락이 제법 얼얼하고 아파왔다. 남자아이들은 구슬치기, 딱지치기, 짤짤이 놀이라고도 있었는데, 동전을 흔들어 수를 맞추는 일명 ‘홀짝 놀이’로 동전의 개수를 홀수인지 짝수인지 어림짐작해보는 상상놀이였다. 남자아이들은 보다 거친 오징어 게임 놀이를 했다. 나도 여러 번 해본 적이 있었는데 꽤나 거친 게임이다. 옷을 쥐어잡기도 하고 아이들끼리 승부욕에 불타 놀다 보면 서로 부딪쳐 다치는 일이 잦았다. 오십 원이면 신나게 게임할 수 있는 오락실도 남학생들에게 인기였다.  오빠는 국민학교 5학년 즈음 오락실이 생겨난 것으로 기억한다. 게임의 신동이던 작은 오라버니는 오십 원 하나로 주야장천 게임을 했다고 들었다. 오락실의 주인아저씨가 우리 오빠를 싫어했을지 모른다. 동전 하나로 오래 버티는 아이였을 테니까. 작은 오빠는 무엇 때문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엄마에게 혼쭐이 나 옷을 홀딱 다 벗고 대문 밖에 서있기도 했다. 다행히 구세주 친척분이 와서 오래지 않아 집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마당에서 야구를 하다 마루 유리창을 깨뜨려 먹은 게 아니었을까 짐작만 해볼 뿐이다. 내 기억에도 작은 오빠는 유리창을 여러 차례 깨먹었다. 그 날의  대문밖 쫓겨난 벌은 지금의 아이들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전화 통화로 그때의 이유를 묻고 답하던 오누이는 그저 웃고 마는 기억이다. 상처도, 아픔도 없다.  똘똘이 오빠가 엄마에게서 벌받은 이유에 대해서 기억을 못 하는데 엄마는 그때 그 시절, 생각이 날까?


©Clker-Free-Vector-, 출처 Pixabay



우리 집 근처에는 도로를 건너 조금만 더 걸어가면 동네 작은 산이 있었다. 꼭대기까지 오르면 산동네로 이어졌다. 우리들의 작은 언덕배기가 있는 동산, 그 언덕, 정상에  이르면 집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었는데 몇 명의 친구들이 살고 있었다. 조그마한 동산은 사계절 자연을 다 누리는 천연 놀이터였다. 메뚜기나 여치 채집하는 건 당연한 계절 행사다. 토끼풀꽃으로 반지나 목걸이를 만들어 놀기도 하고, 네 잎 클로버를 찾아다니기도 했다. 눈이 오는 날에는 일부러 동산을 찾아가 미리 준비해 간 나무 썰매나 커다란 정부미 비닐봉지로 빙판길, 미끄럼을 타면 되었다. 그때는 쌀을 담던 정부미 중에서도 비닐로 된,  빳빳하고 제법 두꺼운 재질로 쌀을 담아 팔기도 했었는데, 겨울날 우리들의 썰매가 될 줄 제조업자는 상상 못 했을 것이다. 없으면 없는 대로, 구색 맞추지 않아도 되는 자연스러운 시절! 모든 게 놀이용 도구가 되던 시절이었다. 정부미, 쌀을 담던 커다란 비닐봉투는 빙판길 썰매 타기에도 제격이었다. 미끄러지는 속도가 못 박아 만든 수고의 열매, 나무썰매보다 꽤 빨랐다. 튼튼하고 오래 탈 수 있는 건 그래도 나무썰매다. 등 뒤에서 밀어주는 이가 있거나, 양손 막대기로 힘주어 밀고 나가는 노동도 필요했다. 아래로 경사진 적당한 자연의 썰매장을 찾아다니다 맘에 든 곳을 발견하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아이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차례로 줄을 지어 썰매를 타면 혼란스러움은 막을 수 있다. 귀마개를 하고 손장갑과 목도리로 무장한 채 놀이에 빠졌나 보다. 발갛게 피어난 얼굴빛으로 집에 돌아오면 그제야 동상이 걸린 것을 알아채곤 했다. 추운 줄 모르고 신나게 놀았던 우리들의 겨울. 나중 상기되었던 얼굴빛은 하얗고도 여린 피부톤이 트러블을 일으키곤 했다. 어깨동무, 내 소꿉친구들. 어릴 적, 그 친구들은 대부분 연락이 끊겼다. 국민학교 시절, 친구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잘 지내고 있을까?


©Sally Wynn, 출처 Pixabay



내가 등교할 때나 바깥에 나설 때나 , 장 보러 나가실 때도, 엄마의 항상 똑같은 소리. 차조심해라. 길조심 해라 모르는 사람 따라가면 안 된다는 당부. 비 오는 날, 우산 들고 가는 길, 양 옆을 잘 살피라는 이야기.

도로에 차나 자전거를 잘 보아야 한다는 단도리. 어린 자녀를 바깥으로 보낼 때의 편치 않은 엄마들의 걱정스러운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가 보다. 놀이에 빠져 정말 신나게 놀았던 탓일까? 잠이 들어 깨어나 보면 아침이었다. 서둘러 가방을 메고 방을 나서면 엄마가 ‘어딜 가냐?’며 묻는다. '학교 가요.' 하면 엄마는 막내딸의 그 모습이 어땠을까? 엄마가 일러주어 알게 됐지만, 다행히 그날의 초저녁이었다. 깜빡이는 형광등처럼 뒤늦게 알아채는 것이 있다면 무언가 수상한 아침이었다는 것을.  낮잠을 너무 길게 잤던 탓에 시간마저 착각을 했었나 보다. 다음날 아침이 아닌 오늘의 저녁! 난 왜 학교 갈 준비를 허둥지둥, 그러면서도 자동으로 몸을 일으켜 나설 생각을 했다니! 지금 생각해보아도 피식, 웃음이 난다.


©cat6719,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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