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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미스럽게 Oct 24. 2021

질문에 응답하라

굿바이, 코로나

삶이 글감


"나에게 가장 무서웠던 때는 언제인가요?"


바로 내뱉기의 신공을 부린다면


즉답은 "전설의 고향"이었다.


어릴 적 드라마다.


긴 머리 흑발의 센 언니가


위, 아래 화이트 깔을 맞춰 입고


이상한 나라의 독보적인 존재감으로


안개를 동반하며 불쑥 등장한다.


눈빛은 희번덕거리며.


날쌔기도 했다. 아니, 날아다닌다.


지붕 위를 걷거나 공중에 매달려있기도 했다.


자꾸 다리를 내놓으랬다.


어린 날 기억, 드라마 속 쎈 언니.


립스틱도 과하게 입술 밖까지 흘려 바르고선


희귀하게 웃음소리를 발산한다. 참 독특한 언니들.


'강시'나 '드라큘라'는 '저리 가라'였다.


드라마라 다행이다.



그것도 추억이야!


어린 날, '전설의 고향' 은 싸한 스릴이 있었다.


장롱 속 이불을 후다닥 꺼내놓고 스탠바이 큐!


아빠 등 뒤에서, 오빠 등을 빌려 어깨너머로


전설의 고향을 만났다.


시그널 음악마저 '무서움의 극치'였다.


어린 날의 등골 오싹한 추억이다.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여름만 되면


납량특집이 제일 싫다.


난 새가슴이다. 채널을 바로 돌린다.


실제로는 내가 더 세지 않을까?


아마도.



X세대 성장기


지나온 세월, 정말 무서웠던 기억


주사, 배앓이, 전쟁 & 고문(역사의 흔적), 최루탄 가스, 공포 영화. 또... IMF.



나는 70년대생, X 세대다.


국민학교 시절에는


새마을 운동의 상징, 초록 모자를 흔히 보며 자랐다.  


새벽종 노랫 소리가 울리는 청소차가 냄새는 났지만, 반갑기도 했다.


새하얀 구름을  뿜어내는 방역차를 따라다녔다.


마치 흰구름 속을 누비듯, 꿈을 꾸는 듯했다.


소독 냄새마저 좋았다.


그곳은 잠시나마 '아이들의 천국'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민주화운동'이 한창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수업 중에도


바람 타고 밀려오는 최루탄 가스 때문에


손수건은 필수품이었고, 따갑고 아파도 참아내야 했다.


시내 거리에서 짭새(그땐 '사복경찰'을 그렇게 불렀다.)들에게


끌려가는 대학생 언니, 오빠들을 보며 자랐다.


충격받은 난 그저 울기만 했다.


민주화 운동으로 도로를 막고 시위하는 언니, 오빠들을 피해


시내버스는 기존 노선이 아닌 길로 '빙' 돌아가야만 했다.


버스 안은 어느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다.


긴 침묵만 조용히 흘렀다.



그날이 오기까지


빨간 표지의 「그날이 오면」.


여고 시절, 그 책자는


나의 손을 떨게 했고, 나의 심장은 빠른 템포로 날뛰었다.


고통스러운 눈물이 흘렀다.


그땐 맞서 싸우지 않더라도 공포였다. 떨리고 무서웠다.


민주화 운동을 보고 자란 나는, 어느새 사회 초년생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도 염원하던 지도자가 대통령이 되었다.


취임식과 함께 IMF를 맞이한 지도자는 목이 메어 연설을 흐렸다.


나는 그렇게 또 따라 울었다.


민주화 시대 오기까지


많은 희생과 오랜 시간이 함께 했다



시시때때로 전쟁의 불안함도


슬며시 고개를 들곤 한다.


편하지만은 않다.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라


어느새 지천명을 앞두고 있다.



마스크는 내 친구


지금은 코로나와 함께다.


전 세계, 위드 코로나 시대.


세상사,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마스크를 구하기 위해 줄지어 서서


오랜 시간 기다리던 건


세계사에 길이 남을 일 아니겠는가.


마스크가 내 친구라니.


지구촌은 '바이러스와 대치 중'이다.


또 달라졌다. 달라지고 있는 중이다.


이번에는 전 세계가 똑같이.


바이러스도 중무장을 하나보다.  


"왜 그러니, 대체?"


검은 머리 풀어헤치고 코로나, 너에게


쎈 언니가 되어 따져볼까?



코로나 검사


누군가는 '피식하고 웃고 마는 일일 수 있겠지만,


나는 검사를 앞두고 며칠 동안 스트레스를 무지 받았다.


콧 속 깊이 찌르는 데


'목구멍까지 와닿았다'는 들은 말 때문이었다.


피할 수만 있다면 도망가고도 싶었다.


상상만 해도 눈물이 '핑' 도는 듯했다.


검사 자체가 공포였다.


'무서움'과 맞먹는 두려움이다.



사는게 뭐길래


올해 여름에만 코로나 검사를  두 번이나 받아야 했다.


배움터의 학원에서 양성 환자가 나온 이유였다.


또 한 번은 아들의 수술을 앞두고,


입실 전 보호자 의무검사였다. 난 강한 척 엄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받아야만 했던 코로나 검사.




희망 사항, 헤어짐의 인사


'코 찌르기'보다 더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는 앞 날이다.


내 아이가 좋은 지구별에서 행복하게 잘 살면 좋겠고,


우리는 백세를 무탈하게 누리며,


무한 장수시대가 펼쳐지면 좋으련만.


기 한껏 펴고, 많이 웃고,


그렇게들 편안하게 살아내면 좋겠다.


가난하지 않게, 힘들지 않게.


이 인사는 꼭 하고 싶어 진다.



"굿바이, 코로나!!!"


"잘 가!"


'헤어짐의 인사'치고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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