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운하 Dec 15. 2022

시골사람, 도시를 가게 되다

가게된 도시에 긴장하다


 이속적인 삶을 살고 있는 내게 있어 대도시로의 여정이 흔한 일이 아니다. 그래도 한 때 대도시의 청년이었고, 몇 년에 한 번씩일지라도 도시 입성이 없었던 것은 아닌 탓에 도시의 유기적인 형상이 뇌리에 맺혀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감성 없이 머물러 있는 기억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기억인 만큼 도시를 되새겨 보려 해도 그믐달 속의 흐릿한 형상 같거나, 어떤 소리를 떠올리려 해도 가물거리는 선잠 속의 소리 같거나, 냄새 또한 겨울의 냉랭한 냄새 같을 뿐이다. 결국 기억의 캔버스 앞에 앉아 도시의 농담을 그리려 해도 선 하나 긋기조차 어렵다. 도시는 내게 있어 이미 아틀란티스의 유적처럼 전설과 고적이 되어버렸다. 이 탓에 도시에 나서는 일이 신기루 속의 오아시스를 향해 가는 낙타를 탄 것 같다. 



 그런 내게 어느 날 어떤 일이 나와 대도시와의 만남을 덜컥 주선하고 말았다. 시골의 고적한 내 집을 떠나 참으로 오랜만에 거대한 도시에서 도시의 감각과 마주해야 한다는 것. 그것은 내게 있어 그토록 숨어있던 아틀란티스 유적이 발견되어 세계가 들썩거리는 일과도 같았다. 실제로는 대단한 일이 아님을 빤히 알고 있었지만. 알고도 속는 마술처럼 내 가슴은 요동쳤다. 그러나 그 요동은 불행히도 축제장에 가는 즐거운 격동이 아니라, 낯선 불모지에 내던져지는 두렵고도 망연한 요동이었다.


 시골과 체계가 다른 시내버스를 탄다던지 지하철을 탄다던지 하는 단조롭고 사소한 일마저도 사뭇 격렬한 일이었고 긴장되는 일이었다. 심지어 시골사람으로서의 냄새나 옷차림까지도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다. 내게 있어 도시에서 치러야 할 일은 깊은 숲에서 홀로 밤을 맞이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젊은 시절 내가 살았던 도시에서 나는 무서울 정도의 어떤 특별한 체제를 경험했던 것이 아니다. 그때 도시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큰 집합체의 주거지에 지나지 않았고, 오늘날에도 역시 마찬가지다. 몸은 점점 비대해지고 화려해졌지만, 생애는 예나 제나 인간의 삶을 포용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생각이 있는 한, 도시로부터 오는 문제는 없어지는 셈이다. 그런데도 나는 무수한 사람들이 득실대고 현대화된 도시를 떠올리는 순간부터 긴장했다.


도시로의 여정이 시작될 때


 어떤 마음이 몰려오건 결국 도시로의 여정은 시작되었다. 맨 먼저 시외버스를 탑승하는 일이었다. 출발시간 직전에 표를 사게 되어 급히 달음박질하여 차에 오르게 되었다. 순간 이른 아침이라 텅 비어 갈 줄 알았던 예상을 깨고 수많은 낯선 눈동자가 엄청난 풍파로 내게 몰아쳤다. 아마도 대부분 내 당황스러움을 눈치 챘으리라 여겨진다. 허둥거리듯 남은 한 자리에 급히 앉았으니까. 

 싸늘한 이른 아침의 시외버스에 가득 찬 사람들은 알고 보니 대부분 읍내에서 고속도로를 달려 대도시로 출퇴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것은 시골에서 미처 생각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내가 경험치 못한 신기한 풍경이기도 했다. 

 그러나 풍경도 풍경이려니와 내게 생긴 문제는 순간적으로 일제히 쏠려온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낯선 사람들의 시선쯤이야 무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수많은 시선들이 내 이목구비를 들쑤시고, 내 옷자락으로 기품의 질을 따지거나, 내 행동으로 성품을 난도질 하는데도 태연할 수 있을까? 


 사람은 궁금증을 잔뜩 지닌 자질을 운명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낯선 사람을 보게 되면 자연스럽게 보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메스를 든 의사처럼 세밀한 의식을 지니고 상대가 지닌 내력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게 된다. 나는 그것을 몹시도 따갑게 여긴다. 한 사람이 보아도 그럴진대 일제히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에 쏘이는 것은, 땅벌의 맹렬한 공격을 느끼는 일과 다를 바 없다. 이미 경험한 바 있지만 정말 혼비백산 하는 일이다. 


도시는 무수한 눈동자로 덮여 있다

 

그 때문에 떠오른 생각이지만, 도시는 수많은 사람들이 무작위로 교차하는 무수한 거리와 공간을 지니고 있다. 어느 곳에 가도 사람의 자태를 보아야 하고 시선에 사로잡혀야 한다. 도시를 생각할 때 그것을 떠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실제로 시골 사람이 도시에서의 행보가 어려운 것은, 길 찾기나 기계작동이나 시설이용 등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시선 속에 놓이는 일이 어려워서 인지도 모른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단순한 일 같지만, 사실상 은하계 어딘가의 별들 속에 사는 매우 불특정한 모습을 지닌 외계인과 외계인의 만남과도 같이 복잡 미묘한 일이다. 그 만남에서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경계심이 아닐까? 또는 급작스러운 공포심이 아닐까? 

 우리가 자주 보는 모습을 떠올려 보자. 세상의 모습에 미숙한 아이들에게 접근하면 거의 대부분 뒷걸음질 치거나 울면서 엄마 품에 뛰어들고 만다. 아이는 경계심을 갖거나 공포에 질린 것이다. 그처럼 낯선 사람에 대한 반감은 우리들 본능 속에 분명히 있고, 자연스러운 시선 속에도 은밀히 숨어있다. 그리고 도시는 무작위로 그런 본능과 시선을 소통시키고 있다. 

 다행인 것은 우리에게 사람과의 만남에 대한 경험으로 익숙해진 관대함이 있고, 그 관대함은 극단적인 반감을 너그러이 순화된 호기심이나 궁금증으로 대신하게 한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사회적으로 학습한 이성, 교양, 도덕 따위로 그것을 잘 감추고 있기도 하다. 그러기에 무작위의 시선이 수없이 교차하며 스치더라도 경계심으로 인한 충돌도 생기지 않고, 공포심으로 인한 절망도 생기지 않는다. 도시 역시 이런 저런 삶의 풍경으로써만 화답한다. 이쯤 되면 언제 어느 때 들러도 도시는 편안하게 안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계속 긴장했다. 시골과 도시, 그곳 사람들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이질감이 있는 까닭이다. 현대를 넘어 미래의 도시와 같은 송도신도시를 배경으로 허름한 촌로가 서있는 정물화를 생각해 보라. 조화를 이루는 ‘여인과 군복’의 밀리터리룩과는 다르게 영 생뚱맞은 정물이 아닐 수 없을 터이다. 이 이질감은 도시사람들 사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것은 외관의 형색 문제이기도 하지만, 서로가 지닌 성향의 내적인 문제로써 달리 설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다지만 


 집과 집 사이의 벽 하나만으로 세계는 달라진다. 이쪽 벽속의 사람은 화사한 사랑을 포옹하고 있으며, 저쪽 벽속의 사람은 깊은 우울의 골짜기에 빠져있다. 물론 이것이 그대로 고착되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또 언제 두 세계의 운명이 바뀔지 모른다. 변형은 삶의 전유물이다. 서로가 다른 세계는 그런 변형을 공평하게 일으키며 영구히 유지된다. 그래서 우리는 포용적으로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그 말은 누군가의 초대를 받아 그 집에서 며칠, 또는 몇 달을 기거해보면 인정할 수 있는 말이거나 친밀한 자들끼리만 할 수 있는 말이다. 서로의 내밀한 삶을 모르는 도시의 거리에서는 함부로 쓸 수 없는 말이다. 

 지푸라기를 잡듯 다만 잡을 수 있는 것은 외관과 행적이다. 그만으로도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를 다소 분별할 수 있다. 사람과의 만남에 익숙하여 관상쟁이와 같은 혜안을 지닌 사람이라면 더욱 선명하게 소통의 빌미를 찾아내거나 잽싸게 피해버리는 묘수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피상적인 것으로써 저 사람과 내가 편안한 소통을 이뤄낼 수 있는 지에 대한 이해를 갖지 못한다. 낯선 누구를 바라보건 도무지 풀 수 없는 비밀처럼 은밀해 보일 뿐이다. 


풀어야 할 도시의 감각


 풀어내야만 한다. 시골에서건 도시에서건 사람들의 평화의식은 모든 역사의 뿌리를 적셔 정다운 이웃을 만들어 놓았다. 도시는 더욱 큰 이웃들의 지반이며, 거기서 서로를 찾는 꿈들이 벽과 벽을 흘러 또 다른 역사의 자궁 속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아름다운 잉태의 행복이요, 우리가 사는 궁극의 희망이다. 그 사랑과 희망의 힘을 믿고 안개처럼 부드럽게 거리에 녹아들어야 한다. 이것이 도시의 감각에 맞춘 멋진 행보이며, 나의 도시 방문이 즐겁게 되는 일이리라. [끝]



[사진출처] ALL PIXBAY - THANK YOU!

매거진의 이전글 냉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