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나의 관계가 역전되었다.
이전까지 내게 할머니는 돌봄의 대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돌봄의 대상은 나였다. 아직 대학생이라 용돈 한 푼 찔러주싶고 쌀 한 포대 더 보내고 싶은 애틋한 손녀가 바로 나였다.
그런 내게 이제 할머니가 돌봄의 대상이 되었다. 할머니는 팔 어깨 관절에 염증이 생겨서 주기적인 병원 방문에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읍내까지 멀리 나가야 하는데,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어려워하는 것은 물론이고 택시에서 내려 걷고 병원 수납 등의 도움이 필요하다. 물론 나는 자식이 아니라 손자다 보니 우선적인 책임은 없지만, 고모들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본가에 갈 때마다 상황이 된다면 꼭 할머니를 병원에 데려가곤 한다.
"할머니, 나 어릴 때는 할머니가 나 병원에 데려갔었잖아. 근데 이제 내가 할머니 병원에 데려가네?"
"하하, 그러게."
할머니는 변해버린 우리의 관계에 쿨하게 너털웃음을 지으며 인정한다. 하지만 나는 자꾸만 마음에 서러운 물이 고인다. 매년 달라지는 할머니의 체력과 건강, 그에 따라 달라지는 우리의 관계. 죽음이란 종착지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는 할머니의 뒤꽁무니를 따라가며 '할머니, 안 가면 안 돼?'하고 초조해하는 기분이다.
내가 좋아하는 구술 생애사 작가이나 노년 전문 작가인 최현숙은 자신의 어머니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작가는 이것을 '해체'라고 표현했다.) 계급과 젠더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풀어냈다. 그럼으로써 작가는 '죽음'이라는 사회적 사건을 직시하고 직시한다. 그러나 나에게 죽음은 반드시 나타날 상실의 사고이며 그렇기에 나에게 있어 죽음은 예견된 고통(김일란 영화감독의 추천사를 참고했다) 일뿐이다. 아마 내게 삶을 살아온 짬이 부족해서일 터다. 나는 할머니 없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 그녀의 온전한 돌봄으로 성인이 되었건만, 그녀의 칭찬과 인정 속에서 자라난 내 자아는 아직도 그녀의 칭찬과 인정을 갈구한다. 그리고 그리워한다.
나는 자꾸만 그녀의 '존재하지 않음'이 두렵다. '그날'을 대비하며 초조해한다. 자꾸만 그녀를 붙잡아두고자 통화 내용을 녹음하고 그녀에 대해 기록하고 사진 찍고 영상을 찍는다. 이 글도 사실 그 초조한 준비의 일환이다.
내가 할머니가 '나의 아가'가 되어버렸다고 느꼈던 순간은 할머니가 내게 자꾸만 "단비 은제 가노?"하고 물어볼 때다. 할머니는 '가지 마'라는 말을 절대 하지 않는 사람이다. 내가 일 때문에 다시 서울로 언제 돌아가야 한다고 미리 공지하면 서운한 마음이 들어도 절대 표현하지 않는다. 내가 부담스러워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5월 초 연휴 때 내려가니 할머니는 내가 하룻밤만 왔다 간다는 사실에 서운해한다.
"에휴 내리(내일) 올라가나? 나는 그래도 몇 날 며칠 내하고 같이 밥 차려먹고 몇 날 있을 줄 알았는데... 우리 단비 가면 또 쓸쓸하게 내 혼자 있겠구나."
"할머니 그래도 내가 주말에 또 내려오기로 했잖아."
"그때는 몇 밤 자는데?"
"그때 두 밤이나 자!"
"두 밤도 내한테는 짧아."
사실 정말 놀랐다. 할머니가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안쓰러운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던 나는, 노동 일정을 조율하여 연휴 내내 할머니 곁에 남아 있기로 했다. 순간 출근을 앞뒀지만, 엄마랑 떨어지길 거부하는 아이가 마음에 밟혀 회사에 사정을 말하고 출근을 미루는 워킹맘의 마음이 이해 갔다. 그렇다. 우리의 관계는 이렇게 역전된 것이다. 그런데 자꾸만 할머니가 묻는다.
"단비 은제 가노?"
"나 세 밤이나 자고 갈 거야"
-다음 날-
"단비야 단비 은제 간다 했제?"
"어.. 나 두 밤 자고 올라가지"
"내가 왜 이러지? 엊저녁에도 물었는데"
느긋하게 아침잠을 자며 할머니의 끊임없는 물음에 몽롱하게 대답하다 잠이 확 달아나는 듯했다. 할머니는 한 달 전에 나와 함께 치매 선별 테스트를 받았다. 치매검사를 받기 전에 치매 검사가 필요한지 아닌지 테스트하는 것인데, 치매검사가 필요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할머니에게는 절대 비밀로 했었는데, 할머니가 자신의 망각을 '인식'하는 것이 내게 두려운 일이다. 그녀가 잊어버리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어도 상처만은 받지 않으면 좋겠다.
이 글은 할머니와 나의 관계에 대한 글이다. 노인이라는 소수자로서 삶을 살아가는 32년생 여성과 그녀가 만들어준 인정과 애착의 고리에서 여전히 허우적대는 어른 아이 95년생 여성의 관계는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되어 이 글에 나타날 것이다. 할머니와 나. 시작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