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읽고,
과연 고전이구나 싶었다. 『자유론』은 그 명성이 무색하게 이해하기 쉬운 매끄러운 문장들로 가득했고 이제는 현대사회의 상식이 된 가치들이 가독성 있는 문장과 문단으로 고르게 배열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감탄한 부분은, 자유가 보장받아야 하는 근거로서 밀이 주장한 논리에 담긴 보편적 인권 의식이었다. 오늘날 자유는 ‘표현의 자유’란 이름으로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정당화하는데 활용되고 있다. 더구나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가 전 세계를 무대로 거침없이 진행되고 있다. 이 때문에 나 또한 자유를 차별을 정당화하는 기득권적 가치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유론』이 말하는 자유의 가치는 '보편적 인권'의 의미였다. 밀은 ‘자유’의 범위를 무제한적이고 무조건적인 권리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음’으로 제한하였고,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려는 사회에 대항한 개인의 권리를 옹호함으로써 약자의 권리가 침범될 수 있는 상황을 경계하였다. 또한 소수의 자격 있는 사람이 아닌 ‘모든 사람’이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유권의 범위를 보편권으로 확장하였다. ‘자유’란 이름으로 차별과 불평등이 정당화되는 현대사회에서 여전히 『자유론』은 유효하다.
밀은 서두에서부터 ‘자유’의 의미를 권력자와 기득권에 대항한 약자의 권리로서 한정한다.
“이 책은 그보다는 시민의 자유 또는 사회적 자유를 중심 주제로 삼고 있다. 다시 말해 나는 이 책에서 사회가 개인을 상대로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성질과 그 한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2장 전체를 할애하여 왜 생각과 토론의 자유가 존중되어야 하는지 설명한다. 그렇다면 생각과 토론의 자유에서 유래한 ‘표현의 자유’는 19세기의 밀이 주장한 자유권으로서 행사되고 있을까? 현대 사회에서 논란이 발생할 때마다 주장의 근거로서 활용되곤 하는 ‘표현의 자유’는 원래 독재 권력 또는 전제 권력에 대항하여 상대적 약자인 언론과 시민의 표현권을 보장하기 위해 나타난 근대적 권리이다. (때문에 밀이 표현의 자유로 예를 드는 사람들도 해당 시대에 상대적 약자였던 그리스도 교인, 소크라테스 등이다) 그러나 근대를 지나 현대 사회에 들어서면서 표현의 자유는 원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 소수자에 대한 혐오 표현이나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를 두고 비판이 일면, 해당 발화자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당했다며 반발한다. 심지어 동성애를 싫어할 자유를 정당화하는데 ‘표현의 자유’가 남발하곤 한다. 명백히 '다수자에 의한 소수자의 횡포'다. 이것을 예견한 걸까? 밀은 민주주의에 있어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다수자의 횡포 또한 경계한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는 의견이나 감정이 부리는 횡포, 그리고 통설과 다른 생각과 습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사회가 법률적 제재 이외의 방법으로 윽박지르며 그 통설을 행동 지침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경향에 대해서도 대비해야 한다.”
“집단의 생각이나 의사가 일정한 한계를 넘어 개인의 독립성에서 함부로 관여하거나 간섭해서는 안된다.”
이렇듯, 자유의 개념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에서 행사되어야 하며, 무엇보다 자유권은 다수자에 의해 간섭되지 않을 권리이다. 표현의 자유가 탄생한 맥락 또한 서양 봉건 사회의 왕정제라는 절대권력에 대항하여 나타난 발화권이며 거대 권력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이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혐오 표현들은 명확하게 소수자를 차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론』은 증언한다. 자유는 차별을 찬성하지 않는다.
이렇듯 마르지 않는 샘물로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자유와 인권에 관한 통찰력을 주는 고전 『자유론』의 저자 밀임에도 불구하고 한계 또한 존재한다. 제국주의 팽창기의 19세기 영국 사회를 살아가는 백인 지식인으로서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태도가 그것이다.
“같은 이유에서 미개 사회에 사는 사람들도 이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그런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아직 미성년자인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초기 상태에서는 독자적인 발언을 가로막는 장애가 너무 커 그것을 극복할 방도를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식민지인은 미개하기 때문에 제국의 지배가 필요하다는 논리는 식민주의를 정당화하는 논리로서 19~20세기 사회를 지배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식민지가 독립된 지금, 식민 지배가 오히려 해당 사회의 근대화를 촉진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부정의한 역사를 정당화하며 21세기를 맴돈다. 여기에서 주목해볼 점은, 여성 참정권이 허용되지 않았던 19세기에 남성과 여성 간의 평등을 주장했던 밀조차도 식민주의를 옹호했다는 점이다. 나는 이것이 근대의 이분법, 즉 ‘공/사 영역 분리 이데올로기’와 깊게 관련된다고 생각한다. 프랑스혁명 이후, 백인 부르주아 남성을 중심으로 천명된 ‘모든 개인은 평등하다’는 명제는 귀족 계급과 자신들의 평등을 주장하기 위해 나타났다. 하지만 백인 부르주아 남성은 여성, 흑인, 식민지인과의 평등은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자 그들은 예외를 둔다. 개인, 정치, 인권, 자유 등의 근대 담론은 공적 영역에만 적용되고 여성, 흑인, 식민지인 등은 사적 영역에 속하기에 이들의 시민권은 행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배경에는 근대성의 이분법이 존재하는데, 왼쪽의 집단은 오른쪽에 비해 열등하기 때문에 보호받아야 한다며 불평등을 정당화한다.
이진경은 그의 저서 『모더니티의 지층들』에서 근대사회란 합리성으로 표상되는 사회로 여겨지지만, 실은 폭력과 지배를 ‘합리성’으로 정당화하는 사회였다고 비판한다.(이에 반해 전근대 사회는 신의 이름으로 폭력과 지배를 정당화하였다)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며, 왜 “모든 개인은 평등하다”는 인권 선언으로 시작된 근대사회에서 제노사이드와 독재 정치 등 가장 비합리적인 사건, 즉 대규모적인 폭력이 발생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제노사이드와 민간인 학살은 전쟁과 관련되지 않은 민간인까지 대규모로 학살한다. 그러나 이 폭력엔 늘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한국전쟁에서 민간인을 학살하고 베트남전에서 민간인을 학살했던 한국군은, 마을에 숨어있는 적군을 박멸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한다.(심지어 한국군은 학살 자체를 부정한다) 르완다 대학살의 명분은 상대 종족을 제거함으로써 ‘하나의 민족만으로 이루어진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였다.(그러나 ‘민족’이 역사사회적으로 구성된 산물인 이상, 하나의 종족으로만 이루어진 나라는 민족주의적 허상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독재 또한 합리화된다. 아무리 민주주의 사회일지라도 “그래도 박정희가 경제 발전시켰다”는 오래된 훈수가 그것이다.
‘인간은 합리적이기 때문에 평등하다’는 근대의 명제는 ‘합리적이지 않은 인간(여성, 흑인, 식민지인)은 평등해질 수 없다’며 차별을 정당화했다. 그리고 20세기에 이르러 ‘합리적인 명분을 지닌 폭력과 독재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밀의 ‘미개한 인간은 계몽이 필요하다’는 식민 지배 정당화는 그 자체가 근대 담론의 한계이기도 하다. 모든 개인은 평등하지만 식민지인은 미개하기 때문에 식민지배가 필요하다는 것, 여성은 감정적이기 때문에 남성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합리적인 인간만이 시민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근대의 이분법에서 기원한다. 밀의 저서를 통해 자유와 인권에 관한 근대적 통찰을 얻으면서도 비판적 독해가 필요한 이유이다.
우리는 자유와 평등을 서로 모순되는 권리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밀에 의하면, 자유란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거나 자유를 얻기 위한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각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자유”이다. 특히 ‘각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자유’라는 구절에는 평등의 권리 또한 배태되어 있다. 어떤 사람도 물적 기반 없이 원하는 삶을 꾸려나갈 자유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평등이 필요한 이유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와 평등은 이분법적으로 모순되는 개념이 아닌,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사회적 가치이다.
자유와 평등이 모순되는 권리라고 여겨지는 까닭은 자유를 ‘무제한적인 자유’로 해석했을 때 발생하는 오독이라고 생각한다. 밀은 『자유론』에서 밝혔듯이 자유의 범위를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지 않는 한’으로 제한하였다. 따라서 자유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모든 인간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삶을 꾸려나갈 자유와, 원하는 삶을 누구나 이룰 수 있는 평등은 동전의 양면처럼 떼래야 땔 수 없는 보편적 권리이자 둘 중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는 사회적 가치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가 헤게모니로서 세계를 떠돌고 거침없이 자유 시장을 확대하는 현대사회는 과연 충분히 자유로운가?
신자유주의가 발흥한 이래 경제적 불평등은 가속화되었고 사회적 안전망이었던 복지는 지속적으로 축소되었으며 세계적인 양극화는 심화되었다. 소수가 사회 대부분의 부를 장악하는 것이 익숙해진 사회에서, 다수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안으로써 떠오른 것은 불평등의 완화가 아닌 ‘혐오’다. 유럽과 영미권에서는 경제적 어려움의 원인이 이민자가 일자리를 뺏어서라고 주장하는 극우 정치세력이 부상하였고 그 결과로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인 2020년을 살고 있다. 한국 사회는 청년 남성들이 더 이상 생계부양자로서의 남성성을 수행하지 못하는 가운데, ‘감히’ 남성보다 많이 소비하는 여성(김치녀, 된장녀)을 혐오하며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분풀이를 한다. 젠더와 인종, 계급 등이 촘촘하고 복잡하게 얽히는 이 세계에서 ‘자유’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신자유주의는 “원하는 삶을 꾸려나가는 자유”를 침해한다. 그러나 ‘다수자’로서의 정체성만을 수호하려는 일부 시민들(백인/남성/정주자)은 불평등의 원인으로 소수자(유색인종/여성/이민자)를 탓하면서 오히려 보편적 인권의 가치를 부정하고 있다. 하지만 19세기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가 존중받아야 하는 근거로서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한 바 있다. 모든 인간이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이 강한 자에 의해 침해받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자유의 이름으로 소수의 인간만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신자유주의 사회, 불평등의 원인을 소수자와 약자의 탓으로 돌리는 혐오 사회, 『자유론』은 ‘자유’의 의미를 다시 곱씹게 만들어 줌으로써 오늘날 인간 존엄성, 즉 인권의 가치를 다시금 상기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