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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인 Sep 21. 2021

미실설원,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광활한 토지

드라마 <선덕여왕> 리뷰

이미지 출처: 미설팡인 모모님 트위터 https://twitter.com/momo_misul?s=20


"이제 미실의 시대이옵니다"
"새주의 꿈이 곧 저의 꿈입니다. "

  

  맹수가 먹잇감을 쫓듯 권력과 야망이라는 목표를 향해 한평생 돌진하는 여자가 있다. 그리고 그 여자의 뒤를 따를 수 있다는 것에 감읍하며 묵묵히 곁을 따르는 남자가 있다. 미실과 설원이다.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도, 죽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설원에게 있어 그 모든 이유는 모두 미실로부터 비롯된다. 미실의 곁으로 돌아가는 것, 미실의 곁을 지키는 것, 미실의 곁을 따르는 것, 이 세 가지가 설원의 존재 목적이자 삶을 살아가는 이유다. 그렇기에 설원의 꿈은 오직 미실로부터 비롯될 수 밖에 없다.

"새주의 꿈이 곧 저의 꿈입니다. "

  그러나 미실이 쫓는 꿈은 설원이 아니다. 황후라는 꿈, 여왕이라는 새로운 꿈, 쥐지 않을 수 없어 때로는 악착같이, 때로는 죄어가듯 쫓았던 꿈만이 미실 삶의 원동력이다. 그렇기에 미실의 선언은 설원을 향하지 않는다. 사람을 얻어 시대를 손아귀에 쥔 미실은 죽은 진흥에게 속삭이듯 천하에 선언한다.

"이제 미실의 시대이옵니다"


이미지 출처: 개양성님 트위터 https://twitter.com/SD_GIF2009?s=20


  애달픈 정인의 자리에도 설원의 몫이 남아 있을 수 있을까? 돌려받고자 하는 기대조차 없이 오로지 미실에게 바치는 그의 연모지만, 애달픈 정인의 자리에도 설원의 자리는 남아 있지 않다. 아련한 첫사랑의 추억조차 이미 죽어 실망도 시킬 수 없는 형 사다함이 절대적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식적 남편이라는 지위도, 그리운 첫사랑의 추억도 모두 지니지 못한 설원은 끊임없이 쓸모를 증명하여 미실의 곁을 지킨다. 병부령이 되어 미실의 군사력을 담당하고 특유의 지략으로 미실과 감히 맞서고자 하는 자들의 속을 간파한다. 진골 귀족 지위의 세종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온갖 음지의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중 설원이 가장 소중히 하고자 하는 것은 미실의 마음을 보살피는 일이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궁주의 모든 것을 나누고 싶습니다. 궁주의 생각과 뜻과 궁주가 품고 있는 모든 것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너희 어머니께서 받으셨을 충격이다."
"새주의 꿈이 곧 저의 꿈입니다. "
"새주,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신분 따위로 누굴 부러워 하는 건 저로 족합니다."


  그러나 그 또한 사람이다. 인간의 마음은 희로애락(喜怒哀樂 )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노여움과 슬픔까지 겻들여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고 어찌 외롭지 않은 날이 없을까. 자신뿐만 아니라 어린 아들까지 이용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겠지만, 그 아들이 명을 따르다 다치는 것 또한 어쩔 수 없겠지만, 황실의 술책에 당할 걱정에 아들의 안위 따위 안중에도 없는 것 같은 미실에게 서운함을 느낀 날이 그라고 없었을까.

"아들 걱정은 안되십니까."

  그럼에도 설원이 미실을 떠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지 출처: 구글


  나는 설원이 미실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면, 설원에게 있어 미실은 그 나무가 감히 뿌리 내릴 수 있었던 광활한 토지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드라마 상에서 설원의 정확한 신분은 언급되지 않았지만, 설원은 미실과 진흥왕의 파격적인 발탁이 없었다면 결코 병부령(오늘날의 국방부 장관)의 자리에 오를 수 없었을 '미천한 신분'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미천한 신분'이라는 설원의 위치성은 설원의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설원의 존재성을 제한하는 공식적 굴레이자 설원의 자아존중감을 절하하는 깊은 상처였을 것이다.


  그러나 미실은 설원의 미천한 신분을 보지 않는다. 신분 너머 설원이라는 사람의 가치와 뛰어난 지략을 알아본다. 그렇기에 '사람을 얻는 자, 천하를 얻는다'는 이치를 알려준 진흥으로부터 미실이 빼앗은 첫사람이 바로 설원이다. 그리고 그렇게 미실은 천하를 얻는다. 물론 미실이 신분 너머의 설원을 인정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쟁취하기 위해 설원의 능력이 필요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골 집안에서 자라며 미천한 신분이라는 이유로 온갖 설움을 겪었을 설원에게 미실로부터 능력을 인정받고 사람으로 존중받는 경험은, 자신의 존재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는 놀라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명치가 뻐근할 정도로 떨려오는 첫 경험이었을 것이며 영원히 간직하고픈 설레임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용당할 것을 뻔히 알지만 철저히 이용당해서라도 미실의 곁에 존재하고 싶은 설원의 소망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신분 너머 고유한 존재성에 대한 인정받음.


이미지 출처: 구글

  미실은 말한다. '사랑은 아낌없이 빼앗는 것'이라고. 그러나 미실은 정말 그렇게 생각할까? 먼저 나는 미실이 '사랑은 아낌없이 빼앗는 것'이라고 말한 이유는, 사다함을 버렸음에도 사다함의 모든 것까지 이용하고 만 스스로에 대한 조소라고 생각한다. 미실은 자신의 야망을 위해 누구보다 순수하게 자신을 사랑했던 사다함을 스스로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다함은 미실의 야망을 위해 기꺼이 가야의 책력을 바친다. 사다함의 사랑에는 이유도, 조건도 없다. 그리고 그 사다함에 대한 미실의 사랑에도 이유도, 조건도 없었다. 그러나 그 이유와 조건 없는 첫사랑보다도 미실에겐 야망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탐이 나고 탐이 나 욕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미실은 사다함을 버리고 자신의 꿈을 쫓았을 것이며 더불어 그런 사다함을 버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두번째로, '사랑은 아낌없이 빼앗는 것'이란 미실의 믿음은 다시 사랑에 빠지는 것에 대한 경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실에게 있어 연모란 모든 것을 잃을 각오로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일평생의 업業이다. 사다함을 사랑할 때 모든 것을 잃을 것을 각오했듯이, 신국을 갖기 위해 모든 것을 걸어야 했듯이. 잃을 것이 없던 젊은 날과 달리 신국을 갖기 위해 모든 것을 건 미실에겐 누군가와 다시 사랑에 빠질 여유 따위 존재할 수 없다. 어린 날의 열정과 치기를 잊을 수 없었을 미실은 추락하듯 빠져들던 도취적 사랑의 감각을 일평생 경계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실은 아낌없이 헌신하는 설원에게 시나브로 젖어들고 말았다.

"왜 전 성골로 태어나지 않은 걸까요?"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성골이 아니라는 서글픔. 철혈같은 미실이 때때로 꺼내 보이는 여린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이는 미실의 기쁨도, 미실의 슬픔도 오직 미실의 모든 순간을 나누고 싶었던 설원 뿐이었다. 미실이 그 곁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알지 못했다. 일평생 사랑에 빠지는 것을 경계했음에도 아낌없는 사랑에 시나브로 젖어 있었음을. 사람의 진심을 꿰뚫을 뿐 아니라, 그 진심까지 이끌어내던 미실은 어떻게 정작 자기 자신의 마음을 몰랐던 걸까?


  설원이 미실을 떠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설원이란 나무는 미실이란 광활한 토지에 이미 뿌리를 내려버려서 미실을 벗어나면 존재할 수 없다. 그렇기에 나무는 자신의 하늘을, 자신의 땅을 떠나는 상상을 꿈에서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미실은 사다함에게 그랬듯, 빠져드는 감각의 사랑이 아니어서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아낌없는 사랑에 시나브로 젖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미실은 한평생 빠져든 사랑의 감각은 그리워하면서 젖어 들고 만 사랑의 감각은 인지하지 못한다. 그리고 최후에 이르러서야 깨닫고 만다. 연모하고 있음을. 설원이 아닌 '자신이' 먼저 떠나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설원공께는 미안합니다."


  이러한 미실이 자신의 마지막 정인에게 건네는 인사는, 연모한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아니다. 당신의 마음도, 당신의 능력도 아낌없이 빼앗고 말아서, 신국이라는 연모만을 쫓느라 뒤따르던 곁을 인지하지 못하고 말아서, 같이 떠나고 싶다는 당신의 청을 들어줄 수 없어서, 죽는 순간에도 뒷일을 부탁하지 않을 수 없어서,


그 모든 것을 또다시 아낌없이 이용하고 말아서


"설원공께는 미안합니다."


이미지 출처: 미설팡인 모모님 트위터 https://twitter.com/momo_misul?s=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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