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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인 Sep 21. 2021

최은영과 김보라가 건네는 작은 위로

김보라, 최은영 외, 『벌새』(arte, 2019)를 읽고

  


문득 맞닥뜨린 어느 문장이 내 안의 둑방을 기어이 터뜨리고 마는 순간이 있다. 악을 쓰듯 고여 있던 슬픔이 범람하는 물길처럼 터져 결국은 둑방을 터뜨리고 마는 순간. 나는 그날, 유리처럼 흔들리는 투명한 물기를 머금고 도망치듯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책 한 권을 손에 쥐고.


은희: 선생님은 자기가 싫어진 적이 있으세요?
영지: 응, 많이. 아주 많이. 나도 똑같아.
은희: 선생님은, 그렇게 좋은 대학에 다니는데도요?
영지: … 자기를 좋아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아. 나는 내가 싫어질 때 그냥 그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해. 이런 마음들이 있구나. 나는 지금 나를 사랑할 수가 없구나.”

김보라, 『벌새』, arte, 2019, p.135-136



  주어진 과업을 이뤄내면 나를 사랑할 수 있으리라 믿던 시절이 있었다. 내신 등급이 더 오르면, 명문대학생이 되면, 아름다운 체형을 갖게 되면, 연애를 하게 된다면, 취업을 하게 된다면, 취업이 보장된다면. 나는 자기혐오를 기반으로 오지 않을 내일을 향해 달리기 위해 나 자신을 채찍질했다. 나는 누가 내려치는지도 알 수 없는 고함과 재촉에 힘이 빠져 지치면서도 지친 나를 메달고 앞을 향해 달려 나갔다. 물 먹은 솜처럼 나란 존재는 너무나 버거웠고, 또 다른 나는 그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그리고 무기력한 나를 짊어지고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 생각하면 물먹은 솜의 버거운 무게는 채 덜어내지 못한 우울의 무게가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기혐오가 앞으로 나아가는 충실한 동력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내가 아닌 나'가 되기를 원하는 욕망은, 사회적 요구와 공명하며 힘차게 나를 밀고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으니까, 이제껏.


지금은 미래에 투자하기 위한 자원이었고, 현재의 고통은 부정되거나 사소한 일로 취급되었다.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가자라는 영화  담임의 말을 비웃을 수만은 없었던 , 내게도 은희의 시절이 비인간성을 강요받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연애하고, 웃고, 떠들고, 노래 부르는 모든 인간다운 행동들로 도리어 비난받아야 했던 시간, 인간으로서의 나의 감정과 욕구에 집중하는 것이 단죄되던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최은영, <그때의 은희들에게>, 김보라, 『벌새』, arte, 2019, p.212-213

  

  나는  글에 쓰인 최은영의 모든 문장을 꼭꼭 씹어 읽으며 내가  최은영의 글로부터 위로를 받을  있는지   있었다. 최은영의 문장은 우울해하지 말라고 가르치 않는다. 자기를 사랑하라고 쉽게 말하 않는다. 대신 단편소설  인물들의 우울했던 젊은 날을 말없이 꺼내 놓는다. 그럼 나는 그들의 옆에 말없이 앉아 있다 간다. 그때 나는 위로를 받는다. 나만 못났던  아니구나. 나만 우울했던  아니구나. 그러니까, 조금 못나고 우울해도 괜찮구나.


 티비를 켜면 나오는 응답하라 시리즈의 인물들은 마냥 아름답고 마냥 행복하며 또한 마냥 성공했다. 쉽게 소리 지르고 분노하는 아버지와의 갈등은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자네”라는 말로 쉽게 봉합된다. 덕선이가 가족 내에서 겪는 상처와 소외감은 어느 집에나 있을 법한 둘째의 소외감으로 퉁쳐진다. 운동권이었던 보라는 안정된 검사가 되고 쓰레기는 의사가 된다. 힘들게 외국계 기업에 취업했을 나정은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키우며 경력단절 여성이 되었지만, 나정이 겪었을지도 모르는 허탈함과 우울감은 의사의 아내라는 빛나는 삶에 가려진다. 그리고 나정과 쓰레기가 함께 사는 고층 아파트는 재개발로 밀어냈을 원주민의 터전을 지운 채 새까만 어둠 속에서 눈부시도록 반짝거린다. 응답하라의 마냥 행복하기만 한 감동 판타지는 그 기반 위에 서 있다. 청춘은 아름답고 그래서 즐거워야만 한다. 나정이네 하숙집에 사는 쓰레기, 해태, 삼천포, 칠봉이, 윤진이는 왁자지껄한 즐거움과 캠퍼스의 우정을 나누며 낭만의 서사를 완성해낸다.


  그러나 모든 청춘이 그러했던가.


  최은영의 소설 속 인간들은 완벽하지 않다. 또한 마냥 행복하지 않다. <손길>의 혜인,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의 희원, <지나가는 밤>의 윤희와 주희는 틀어지고 만 관계 앞에서 서성인다. 다듬어지지 못한 말이 상대의 여린 틈에 메다 꽂히고 말았던 순간을 잊지 못해 관계의 흔적 앞에서 서성인다. <모래로 지은 집>의 공무, 선미, 모래는 전형적인 대학의 아싸다. 하지만, 인에서 벗어나 아웃에 모인 공무, 선미, 모래는 자신들만의 인을 만들어 간다.

그리고 나는 그들 곁에 잠시 앉아 본다.


 내가 못나서 우울한 거라 생각했던 지나온 어린 날들이 그들의 곁에 잠시 앉아 본다. 그리고 나는 깨닫는다. 너희가 못나서 우울했던 게 아닌 것처럼 내가 못나서 우울했던 게 아니구나. 그러면 나는 그들의 존재에 작은 위로와 공감을 받아 다시 걷는다.


위로받고 싶었던 사람들이 위로하는 것처럼,
외로웠던 사람들이 외로운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최은영, <그때의 은희들에게>, 김보라,『벌새』, arte, 2019, p.214


  은희에게 위로를 건네주었던 영지 선생님이, 실은 다 자란 은희라고 생각하면, 다 자란 은희가 그때의 은희의 곁에 함께 있어주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은희를 만나러 온 것이라 생각하면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우리는 모두 그런 시절을 거치며 어린 날들의 아픔을 지나오지 않았나. 다 자란 나에게 묻고 싶은 마음, 나는 언제쯤 나를 사랑할 수 있을지, 그렇게 좋은 대학을 나오면 나를 사랑할 수 있을지, 말하지 않아도 내 모든 아픔을 이해할 또 다른 나에게 위로받고 싶지 않았나. 왜냐면 설명하지 않아도 그 우울의 존재를 이해받을 수 있으니까. 그래도 된다고.


“진심 어린 공감은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 따져 묻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함께 느껴 주는 태도는 아픈 사람을 자신만의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한다. 마음은 단죄의 대상이 아니다. 비록 그늘지고 아픈 마음이더라도 그 마음을 박해할 필요도, 부정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되지 않는데 억지로 자신을 사랑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된다.”

최은영, <그때의 은희들에게>, 김보라,『벌새』, arte, 2019, p.214


  은희가 오빠로부터 겪는 물리적 폭력이 폭력인 이유는, 폭력에 굴종하는 자신을 그저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그 시간의 파편들 속에서, 자신은 맞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폭력의 상흔이 은희의 몸에 새겨질수록 증발한다. 은희는 자신의 존엄을 잊는다. 그러나 이러한 은희의 상흔은 영지 선생님의 눈길을 통해 '상처'로 명명된다. 눈길을 통해 존엄을 얻는다.


고통은 언제 고통이 되나. 누군가의 시선으로, 공감으로, 고통은 고통이 된다.

최은영, <그때의 은희들에게>, 김보라,『벌새』, arte, 2019, p.210


 부모님에 의해 "너네 싸우지  " 치부되었던 '남매 싸움' 영지 선생님의 "은희야  맞지 "라는 말을 통해 그제야 '가정폭력'으로 호명된다.  순간, 은희는 존엄을 되찾는다. 모든 사람이 당연히 지녔다고 여겨지는 존엄은 모두가 당연히 소유하고 있는 무언가가 아니다. 존엄은 관계 속에서 순간적으로 구성되고 흩어진다. 존중받는 순간 유지되고, 존중받지 않는 순간 증발하고 만다. 맞아서는  되는 사람, 존중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는 태도는 존중받는 관계 속에서 비로소 생성되는 '순간적 가치'이다. 오빠의 폭력과 가족의 방관 속에서 휘발되었던 은희의 존엄은 영지 선생님의 눈길과 단호한 명명을 통해 회복된다.


한국 사회에는 상처를 미화하는 문화가 있다. 상처 받은 사람이 상처를 '극복'하고 강해지는 서사를 환영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중략) 인간은 상처가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만 성장한다. 사랑은 상처가 상처로만 머물게 하지 않고, 인간을 상처 속에 매몰되어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무감한 사람으로 변하도록 두지 않는다. 은희는 영지 선생님과의 만남을 통과하며 사랑받아 성장했다. 함부로 대우받아 성장한 것이 아니라.

최은영, <그때의 은희들에게>, 김보라,『벌새』, arte, 2019, p.213


  나는 영지가 실은  자란 은희라고 믿는다. 외롭고 막막한 20대의 끝자락에서 그때의 은희를 안아주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것이라 믿는다. 은희에게 눈길을 주고 은희의 말을 들어주고 은희가 갖고 있는 마음들을 그저 안아주는 ,  시간을 통해 어린 은희뿐만 아니라   은희도 회복의 시간을 통과할  있었으리라 믿는다.


  통과한 이후엔 언제나 다음 삶이 기다리고 있다. 은희는 수학여행을 떠났고 다 큰 은희, 영지에게는 나아가야 할 삶의 여정이 존재할 것이다. 쉽진 않겠지, 그러나 숨 한번 들이쉬고 나아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오직 사랑의 관계 속에서 힘을 얻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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