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였으면 좋았을 텐데..
내 마음속엔 프리즘이 있다. 이 프리즘은 평소엔 잠자코 있지만, 어떤 날은 높이 올라와 나의 소소한 행복과 기쁨을 굴절시킨다. 아쉽게도,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고.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설국, 또는 겨울 왕국이었다. 첫째는 이미 침대에서 내려가 창가에 딱 달라붙어서 “곧 산타 할아버지 오실 것 같아~ 탄이(본인의 애착 오랑우탄 인형) 눈 분유도 줘야겠다!”하고 있었다. 그래서 서둘러 온 가족이 아침을 먹었다. 남편이 크리스마스 캐럴도 틀어 놨고, 나는 산타 할아버지를 정말 좋아하는 첫째에게 산타 할아버지를 직접 만날 기회를 주고 싶어 ‘산타 오는 곳’을 몇 군데 검색하고 있었다(기관에 다니면 아마 기관에서 만나겠지만.. 우리 아이들은 산타 할아버지가 오시는 곳을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이때까지만 해도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취해 기분이 좋았는데..
잠시 뒤, 본인 식사를 끝낸 남편이 소파에 가서 드러눕더니(..) 한참 있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는 “우리 빨리 눈 놀이 하러 가자! 눈싸움도 하고 눈 오리도 만들고 할까?”하고는 혼자 옷을 챙겨 입고 준비를 시작했다. 엥..? 난 아직 둘째 이유식을 먹이는 중이고, 아무도 아직 식사를 다 안 끝냈는데..? 싶었지만 잠자코 있었다. ‘기계(?)광’인 남편은 어제 산 눈 오리 만드는 집게를 써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아직 기어 다니기만 하는 둘째를 데리고 휑하니 나가 버렸으니까(평소엔 남편이 첫째를 데리고 먼저 나가고, 나는 이것저것 챙겨 둘째와 나가는 편이다).
이때부터 좀 섭섭하고 헛헛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마음속 프리즘을 만지작거린 것이다. “아빠 벌써 나갔어? 아빠 보고 싶어~” 하며 살짝 울먹이면서도 옷은 입기 싫다는 첫째를 잘 구슬려 현관까지 갔는데, 어제 나들이의 여파로 첫째의 장갑과 모자를 차에 두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가 첫째와 둘째 유모차를 전부 접었다 폈다 하고, 뒷좌석까지 다 뒤져서 겨우 장갑과 모자를 찾아냈다. 거기다 첫째는 “엄마 유모차 바퀴 지저분하니까 안 만지게 조심해~” 라든가 “엄마도 아빠 보고 싶어? 아빠 빨리 보고 싶어~” 하며 옆에서 추임새를 넣고 있었다. 밖으로 한 발짝도 내딛지 않았는데, 벌써 땀이 조금씩 나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현관 밖으로 나갔더니 남편이 눈 오리를 잔뜩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방풍커버 안에서 멍하니 우리를 쳐다보는 둘째와 함께. 계단에서 부주의하게 미끄러질 뻔한 첫째에게 한 번 큰 소리를 낸 후(잘 보고 가야지! 넘어질 뻔했잖아!) 눈밭으로 내려오자마자,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남편이 “왜 이리 늦었어? 뭐 했어? “라고 쏘아붙였다. 내가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고 분노의 화신이 된 순간이었다. 다시 글로 쓰기 민망할 정도의 험한 말을 포함해서 여러 문장들을 다다다다 쏟아냈다. 그동안의 마음 챙김과 감정조절, 아이들이 다 보고 있다는 것.. 어느 하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어제 니가(남편은 나보다 나이가 많다) 장갑이랑 모자 제대로 안 챙겨가지고 지하까지 갔다 왔잖아! 지는 아침 먹고 쌩하니 나가기만 해 놓고! 야! 니 혼자 오리 만들고 있으니까 좋았냐? (부끄러워서 차마 이 뒷부분은 쓰지 못하겠다..)“
심지어 남편이 ”그럼 나 집에 갈래. “ 하며 뒤돌아가길래 ”야! 내가 갈 거야! “ 하면서 남편을 앞질러 가기도 했다. 그러다 뒤를 돌아봤더니 혼잣말로 “눈 뽀드득뽀드득 밟아볼래~”하고 걷던 첫째의 당황한 표정과, 유모차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던 둘째의 얼굴이 보였다. 그 순간 ’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왜 우리 소중한 아가들의 크리스마스이브를 내가 망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아직 늦지 않았어. 지금부터라도 바로 잡자. 모든 걸 굴절시키는 프리즘을 다시 내려놓자.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고, 미소를 지으며 첫째에게 다가갔다. "우와~ 뽀드득뽀드득 소리 많이 난다 그치?" 남편도 와서 "우리 눈 오리 만들어 볼까?"하고 집게 사용법을 첫째에게 알려줬다. 그 이후 눈 놀이를 하는 동안은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다. 쭈그리고 앉아 눈사람을 만드는 내 얼굴에 남편이 던진 눈덩이가 정면으로 날아들어서, 머리가 '퍽-' 하는 느낌을 받았는데도(당황한 남편이 "어! 괜찮아? 그렇게 세게 던지려고 한 건 아닌데"할 정도였다) 그냥 웃고 넘길 수 있을 만큼. 나는 원래 이렇게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엄마가 된 최근 몇 년 간 자주 그랬듯이 오늘도 '나 혹시 조울증인가?' 하는 의구심과 함께 내 밑바닥을 보고 말았다.
첫째는 신이 나서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나는 첫째를 이리저리 쫓아다니고, 남편은 둘째 유모차를 밀며 한 시간쯤 보냈다. 눈이 많이 오는 곳에 있는 직장을 다닌 뒤 눈(정확히는 '쌓여 있는 눈을 밟고 다니는 것')을 싫어하게 된 나였지만, 이렇게 같이 노니까 점점 기분이 더 좋아졌다. 마치 롤러코스터가 급강하 지점까지 서서히 올라가는 것처럼. '둘째가 추워하니' 남편이 둘째를 데리고 먼저 들어가겠다고 한 것도 내 기분을 꺾지 못했다. 첫째와 나는 돌고 돌다 기어이 아파트 뒤편의 놀이터까지 누비고 한참 뒤에 집에 갔는데, 그때의 나는 추운 것도 '겨울이라 공기가 상쾌한데?', 조금 미끄러운 땅도 '우리 첫째의 감각 발달에 좋겠는데?'라고 받아들일 만큼 긍정왕이 되어 있었다. 심지어 집에 가니 남편이 따뜻한 볶음밥도 만들어 놓았다. 우리 온 가족이 다 먹을 밥을! 크리스마스의 행복이 이런 걸까? 싶었다.
하지만 점심을 먹고, 이제 일을 많이 했으니 낮잠을 좀 자야겠다는 남편의 말을 들으니 피크를 찍은 내 맘속 롤러코스터가 급강하를 시작했다. 원래는 오후에 산타를 보러 가기로 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첫째가 저렇게 좋아하는데, 아빠로서 한 번 가 주면 안 되나?' 하는 희생 강요, '(낮잠을 잤으면 하는) 아이들이 다 깨 있는데 당신이 감히 낮잠을..? 그럼 내가 혼자 둘을 상대해야 하잖아. 평일에도 맨날 그러는데 주말엔 좀 같이 해야 하지 않나? 잠은 애들 자고 나면 자야지!' 하는 꼰대 마인드까지. 다시 한번 난 이런 사람이구나.. 하며 내 머릿속 밑바닥을 쳤다. 그런데 이번엔 바닥을 치고 반등한 게 아니라, 그냥 오후 내내 바닥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거기서, 한 번 더 들어 올리기 전에 프리즘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오늘 크리스마스이브니까 크리스마스 책 읽어줘~"하며 책을 가져오는 첫째의 요구에도 시큰둥하게 대꾸하고, 책도 영혼 없이 읽어 주고.. 둘째는 "이제 낮잠 잘 시간이지!" 하며 침대에 넣어버리고.. 이런 엄마가 되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다 방에서 나온 남편이 좀 있다 카페를 가자고 했다. 점심때부터 갑자기 원두를 갈아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아무래도 원두를 사려는 것 같았다. 의도야 어찌 됐든, 크리스마스이브의 가족 나들이가 될 터여서 좋았다. 그런데 시간이 문제였다. 어영부영하다 보니 5시가 되었는데, 남편이 '이미 너무 늦었다'는 거였다. 아니 그럼 방에서 나오자마자 갔어야지..? 더군다나 아이들 기저귀 갈고 옷 입히는 준비는 내가 혼자 다 시켰는데, 본인 옷만 입고 나와서는 또 "엄마는 늦게 준비하니까 우리 여기서 기다리자~" 며 첫째를 데리고 소파에 앉은 남편을 보니 속에서 또 뭔가 올라왔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현관을 나서면서까지 "난 이렇게 늦게 나오는 게 싫어. 네가 이렇게 늦은 시간에 나오자고 할 때마다 나는 속이 너무 답답해."라는 남편의 말에 결국 프리즘을 또 한 번 들어 올렸다. 오전의 행복이 굴절되어 실망과 황당함, 서운함이 온통 뒤섞인 감정으로 변했다. 또 저녁의 가족 나들이를 망치든 말든 내 감정을 큰 소리로 쏟아냈다. '소리 높여 노래 불러도' 모자랄 판에, 정말 그냥 소리만 높였다.
이 글을 쓰다 보니 알겠다. 남편이 하는 행동은, 뭐 어떤 행동을 하든 간에 나도 그동안의 적응기간을 거치며 그냥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순간 나는 항상 만지작거리던 프리즘을 들어 올렸다. 그러면 행복이 프리즘을 통해 섭섭함과 실망감의 혼합물이 될 때도 있고, 그냥 순수한 분노에 가까운 것이 될 때도 있었다. 그동안 나의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깨어있는 부모>나 <깨어있는 양육>, <내 안의 내면아이가 울고 있다> 같은 책도 읽고, 감정 조절 강의도 많이 들어왔지만 남편의 한마디에 머릿속이 백지가 되었다. 남편을 탓하려는 게 아니다. 솔직히 남편도 그냥 놀지만은 않고, 자기 나름대로 뭔가를 한다. 청소든, 요리든. 그리고 남편은 그냥 자기가 느낀 바, 자기 생각을 내게 말했을 뿐이다. 그리고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말할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게 내 평소의 지론이다. 그동안의 공부에 따르면 내가 상황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에 따른 내 감정이 흘러가는 대로 지켜보며 '감정을 평온하게 처리'해야 하는데, 그게 정말 말처럼 쉽지 않다.
그래도 무엇이 정확하게 나로 하여금 프리즘을 들어 올리게 하는지 깨달았다는 데 의의를 두자. 첫째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 미안하다는 사과만 열 번쯤 했던 크리스마스이브였지만, 내년엔, 아니 당장 크리스마스인 내일부터도 사과를 조금 덜 하도록 감정 조절에 공을 들여 보자. 카페 갔다가 집에 와서 둘째 이유식을 먹일 때, 자꾸 양손으로 숟가락 머리를 쥐고 밥알을 온 얼굴과 의자, 식탁에 발라대는(!) 둘째를 보고도 심호흡을 하며 큰 소리를 내지 않은 나 자신을 생각해 보자. 감정 조절, 나도 할 수 있다! 그러면 맘속의 프리즘을 고이 눕힐 뿐 아니라, 여유롭게 갈고닦을 수도 있겠지.
내년엔 굴절된 '앵그리' 대신 아주 기쁜 마음으로 "메리 크리스마스이브~"라고 할 수 있기를. 나의 행복을 크게 꺾고 굴절시키는 대신, 여러 갈래와 빛깔의 소소한 행복으로 나눠 마음껏 즐기게 해주는 프리즘을 갖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