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에서 발굴한 제 3의 공간
여수는 겨울에 비교적 따뜻하고 여름에 덥지 않으며 바다 풍경이 수려해서 술맛, 입맛이 더 좋아지는 곳이다. 여수에 두 달 반 체류하며 발굴한 근사한 공간을 소개한다.
1. 피어하우스 (Pier Haus)
웅천 신도시 마리나(요트 정박장) 앞에 위치한 브런치 카페 겸 와인바이다.
통창에 개방감 있고 널찍하다. 창 너머 바다가 보인다.
사람이 북적이는 대형 카페 느낌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마리나 한 구석에 조용히 자리잡아 여유로우면서 뷰는 좋다. 아는 사람만 알고 찾아가는 분위기이다.
인터리어에 눈이 즐겁다. "feast for the eye"라는 말이 딱 맞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풍경에 마음은 내적으로 조용히 흥겨워진다. 쨍한 울트라 머린 블루를 사랑한 작가의 작품이 한 점 있다. 창너머 바다 풍경과도 잘 어울린다. 연녹회색 바탕에 파란색 페인트를 엎지른 듯한 형상인데 파랑새가 날아오르는 태세 같기도 하다. 파란색은 시원하고 녹회색 배경은 따뜻하다. 창 너머 바다, 벽에 붙은 이브 클라인 하나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이곳에 올 가치가 충분하다.
뉴질랜드 어느 바닷가의 브런치 카페 같기도 하다. 여유롭고 자유로운 분위기이다. 낮에는 보사노바풍, 저녁이 무르익어가자 느릿한 로맨틱 힙합(?)을 틀어준다. 스피커가 크고 울림이 좋다. 실내 구조가 음악이 잘 퍼지게 되어있다. 테이블은 여유롭게 드문드문 있다.
화장실에 이숍 핸드워시가 있고 바 위에 인센스 스틱에서 달콤한 코코넛 밀크 향이 은은하게 피어오른다.
주문은 바에서, 서빙은 직원이 직접 테이블로 가져다준다. 미국처럼 팁을 주는 문화도 아닌데 넘칠듯한 라테를 테이블까지 조심조심 가져다 주는게 감동이다. 서비스가 자동화될수록 이런 사람 손길 닿는 서비스가 흐믓하다. 라테는 배 띄우고 뱃놀이해도 좋을 정도로 호수같이 넓은 잔에 거품을 쫀쫀히 해서 가득 담아준다. 찻잔과 받침은 모두 백자다.
이 공간에 있는 순간이 좋아 스케치를 하고 싶었다. 글 쓸 마음은 물론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영감을 주는 공간이다.
2. 한루커피
여수 신기동 흥국상가의 작은 골목에 자리잡은 아담한 카페다. 혼자 하루를 정리하러 가기 좋은 공간이다. 카페이름 '한루'는 '하루의 루틴'이라는 뜻이다. 오늘의 기분을 쪽지에 적어 담는 상자가 있다. 테이블마다 위트있는 문장이 붙어있다. 곳곳에 시집이 비치되어 있다. 마샬 스피커가 있고 음악은 혁오, 검정치마, 잔나비, 김필 류를 틀어준다. 곡을 신청할 수도 있다.
디저트가 하나하나 정성스럽고 맛있다. 무얼 먹을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도착했을 때 디저트 쇼케이스에 있는 걸 먹으면 된다. 디저트가 금방 떨어지기 때문이다.
커피가 맛있고 차는 알디프(aldif) 차를 내준다. 알디프는 차를 젊은 감각에 맞춰 창의적으로 개발하는 국내 차 브랜드이다. 차에 음악, 스토리, 영화를 연결시켜 차에 어울리는 차 소개 카드를 만들기도 한다.
나는 주로 퇴근 후 평일 저녁에 가는데 어두운 골목에 조그마한 정사각형 간판이 빛나고 있으면 반갑다. 학교 다닐 때 밤에 학생회관 동아리방에 불이 켜진 걸 보는 것 같다. 젊은 남자 사장님이 혼자 운영하고 매일 쓰레드에 영업일지를 올린다. 이제 가게 문을 연지 1년차인데 이 공간이 오랫동안 지켜지길 응원한다.
혼자만의 시간을 즐겨도 좋지만 연인끼리 친구끼리도 많이 온다. 지난 주말에는 서로 처음 본 듯한 남녀가 대각선 테이블에 앉아있었는데 존대말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서로에게 깊이 집중하며 조심스레 자신을 드러냈다. 거미가 You're everything (검정치마 원곡)을 호소력 짙게 느리게 부르자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하고, 김필의 백야로 넘어가자 화제는 자신이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서 내가 언제 어떻게 우는지로 흘렀다.
남: 저는 본질을 추구하거든요. 제가 말을 잘 못해요. 인간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업어요.
여: 저는 사람을 좋아해서 상처를 잘 받는 것 같아요.
21세기 한국판 제시와 셀린느다. 이곳은 영화같은 현실이 가능한 공간이다.
3. 뉴포트 커피클럽
여수 신기동 언덕 위에 있는 테라스 딸린 커피집이다. 여수 옛 철길을 산책길/자전거길로 개조해 조성한 공원 바로 앞에 있어 산책하다가 들리기 좋다. 뉴포트는 미국 동부의 유명한 휴양지이며 그것이 이 공간의 추구미이다. 영국 티타임을 즐기는 할머니의 주방 같은 다정한 분위기와 여행자의 설레임과 즐거움이 공존한다. 데이비드 호크니와 머릴린 먼로 사진 등 크고 작은 미국풍 그림이 곳곳에 비치되어 있다. 미국 문화가 주는 경쾌함과 즐거움, 영국의 세련된 차 문화, 산업 사회 초창기의 현대미가 담겨있다. 올드한 현대미랄까.
내부 공간에 테이블은 같은 것이 하나도 없고 제각각 개성 있어, 앉을 자리를 고르는 재미가 있다. 공간을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 바닥 타일을 아예 다르게 깔기도 했다. 코펜하겐 구역은 실내에서도 약간 독립적인 공간처럼 꾸몄다. 음악은 적절하다. 선곡이 좋아서 알바생에게 곡을 물어보니 유튜브 플리 사이트였다.
테라스도 멋지다. 돛단배 닻 같은 천으로 차양을 드리웠고 인조 잔디를 깔았다. 날이 좋으면 햇빛 쬐기 좋은 공간이다. 개/동물 동반 가능하다.
한 번은 크리스마스께 유치원생 딸과 아빠가 저녁에 산책하다 들렸다. 아빠가 딸에게 환경보호 관련 동화책을 읽어주었다. 아이 친화적인 공간이다.
커피도 맛있고 쿠키와 케잌도 맛좋다.
카운터에는 사장님이 어쩌다 여기에 카페를 하게되었는지 사연을 적은 글이 붙어있다. 원래 애니메이션인가 다큐를 제작하던 분이라고 한다.
기분 톤 업!하기 좋은 곳이다.
애정하는 제 3의 공간(집도, 일터도 아닌, 반은 사적이고 반은 사회적인 공간)을 이렇게 확보해 놓으니 이 지역에 더 뿌리를 내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