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 휴가저택

80년대 한국 르네상스

by 자낫


전라남도 광양에 소재한 '휴가저택'을 다녀왔다. 오래된 저택을 1층 카페, 2층 책방으로 개조한 공간이다. 앞뜰에는 세월을 나타내는 커다란 나무가 풍성한 나뭇잎을 자랑하며 반짝였다. 재건축이 성행하는 나라에서 수십 년의 세월을 거쳐 살아남을만한 건축 유산이다. 이것이 한국 현대사의 헤리티지(heritage)이다.


담장은 그냥 벽돌을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편육같이 넓적한 돌을 착착 쌓고 중간중간 큼직한 돌을 박아 지루하지 않다. 암모나이트가 나올 것 같은 백악기부터 켜켜이 쌓인 지층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돌담은 집이 반신욕을 하는 것처럼 건물의 상체를 반쯤 드러내게 쳤다. 부자라고 담을 높이 쌓지 않고 바깥세상과 소통하는 열린 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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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휴가저택. 담장 오른쪽에 난 대문은 사람과 차량 출입을 구분했다. 2026. 2. 7.



돈 내고 커피 마시러 가는 곳이지만 상업시설에 들어가는 것 같지 않고 가정집에 방문하는 것 같다. 현 가게 주인이 저택 안팎으로 외형을 잘 보존했다. 저택 맞은편에 주차장이 있다. 촘촘히 다섯 대 정도 주차할 수 있다. 정문에 들어서면 징검다리 같은 네모 돌판이 잔디밭 사이에 총총 박혀있다. 낮은 돌계단이 현관문으로 인도한다. 벽면에 큼직한 유리창을 냈다. 현관문도 가정식이다. 남의 집에 초대되어 들어가는 것처럼 큰 철제문을 열며 마음을 한 번 더 여미게 된다.


안에 들어서면 카페 카운터와 메인 홀이 있고 구석구석 방이 있다. 7,80년대 문화생활의 극치를 보여주는 듯하다. 저택의 주인이 남긴 소품들이 벽 한 면에 전시되어 있다. 73년에 우편으로 발송된 티브이 수신료 고지서에는 '티브이가 고장 나거나 중고상에게 매도할 경우 수신료를 억울하게 납부하지 않도록 해지 신청을 하시라'는 문구가 있다. 공과금 통지서에 사용자의 억울한 마음을 배려해 문구로 표시한 게 재밌었다. 사람의 감정이 공식적으로 고려되는 70년대였다. 전기도 보급되기 어려웠던 시절에 티브이를 소유했던 집주인의 문화 수준도 보인다.


무엇보다 잭팟!이었던 것은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는 양장 핸드북이었다. 고급스러운 적갈색 가죽 표지에 한 손에 착 감기는 책자로 속지도 성경 책처럼 질기고 부드러운 고급 종이를 썼다. 88 올림픽을 앞든 1987년, 해외여행을 가는 국민에게 정부가 보급한 해외여행안내서이다. 개발도상국에서 막 벗어나기 시작한 시점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엄청난 사료이다. 머리말과 본문 일부를 옮겨본다. 예스러운 말투, 공문서에 담긴 감정적인 표현을 즐감하시라.


머 리 말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 국민은 국제화 개방화의 시대적 추세에 따라 지난날 보다 해외여행의 기회를 자주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적인 일이든, 공적인 일이든 해외여행의 경우는 우리와 다른 풍물, 새로운 사회를 접하게 되기 때문에 누구나 기대가 부풀게 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해외여행을 통해 남의 것을 보는 일에 못지않게 우리 것을 올바르게 알고 외국인에게 알리는 일 또한 중요하다 하겠읍니다. 더구나 우리가 해외여행을 할 때 만나는 여러 외국인들은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관심을 갖고 갖가지 질문을 해옵니다. 그것은 오늘날 개발도상국의 선두 주자요, '88올림픽 개최국으로서 우리의 국력과 국위가 세계 속에 힘차게 뻗어 나가고 있기에, 더욱 그러한 경우가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아무쪼록 이 책이 다소나마 도움이 되어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를 늘 지니고 즐겁고 보람 있는 여행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인자한 교장 선생님 말투를 고수한다. 성인 국민을 교육해야 할 어린이로 보는 지배자의 시선이다. '의자에 앉을 때 두 무릎이 벌어지지 않도록 조심해라', '자주 면도를 하여 용모를 깨끗이 하고 구두를 수시로 닦아라', '기내에서 술은 조금만 마셔라' 등 잔소리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올림픽을 개최하기 위해서는 스포츠 시설뿐만 아니라, 정치·사회·문화·환경·인권 분야에 일정 심사 기준이 있어, 그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한 나라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자원과 지성을 총동원한다. 한국은 88 올림픽을 앞두고 세계적인 행사 주최국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해외여행에 나가는 국민들에게 이런 교본까지 나누어 주었다.


외국에서의 생활

식사 예법(Etiquette)을 지키자. 포크나 칼을 떨어뜨렸을 때는 너무 당황하지 말고 조용하게 시중하는 급사를 부르면 된다.


당시 반공을 기반으로 온 국민을 응집시키고 정권의 정당성을 찾고자 한 군사정권의 기조에 맞춰 '평화통일'에 대한 챕터도 상당한 분량을 차지한다.


"그러면 북한 공산 집단은 어떠한 통일 방안을 들고나왔는가? 저들은 그동안 겉으로는 줄곧 「평화적 통일론」을 입버릇처럼 외쳐 왔으나, 그 속셈은 너무나 음흉하고 악랄한 것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발행처는 서울 장충동에 위치한 '자유공론사'이다. 반공 냄새가 물씬 난다. 주소지는 현재 한국자유총연맹 건물 앞마당이다. 자유공론사는 현재 검색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당시의 말투와 정권의 기조, 사회상이 보여 매우 흥미로웠다.


휴가 저택의 2층은 '읽는 다락'이고 Axt, Littor, New Philosopher 같은 문학, 인문학 잡지와 고풍스러운 의자, 책장이 비치되어 있다. 2층까지 올라가는 계단에 붉은 양탄자가 깔려있고 난간대는 반질반질한 나무이다. 손안에 착 잡히는 촉감이 좋아 일부러 천천히 올라갔다. 읽는 다락은 계단 옆에 준비해둔 실내화로 갈아 신고 올라갈 수 있다. 얇은 실내화 밑창 아래로 밟는 양탄자의 폭신과 단단 중간쯤 감각도 매우 좋다.


유리문 달린 난무 책장에 뿌리 깊은 나무 출판사의 한국의 발견 시리즈, 세계문학 전집을 전시한다. 물론 하드커버다. 뿌리 깊은 나무 출판사, 얼마나 반갑던지. 보릿고개 시절에도 고급 향토 문화 예술을 발굴하고 알리던 故 한창기 선생이 설립한 출판사이다. 미국에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떼다 번역해서 팔았는데 미국 본사에다 너네가 한국에서 장사하려면 한국 백과사전 편찬에도 투자하라고 설득해서 '한국의 발견 시리즈'를 냈다. 광양에서 가까운 순천 사람이다. 순천에 그를 기린 뿌리 깊은 나무 박물관이 있다.


읽는 다락 안쪽엔 독립 서점 '와온 서가'가 자리 잡고 있다. 책 큐레이션이 좋다. 그림책, 문학, 시, 에세이류가 많다. 한국의 자랑 한강 작가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 몇몇 책에는 손 글씨로 쓴 책 소개 글이 붙어있다.


휴가 저택은 시집 제목에서 따온 이름이란다. 나는 누군가가 휴가를 보내던 개인 별장인 줄 알았다. 현관 문밖에는 '당신의 휴가는 어떤 모습인가요?'라는 물음이 적혀있다.


'아는 언니 어머니께서 30년 사신 돌집'을 개조해 이런 문화살롱을 오픈했다고 한다.


개장일은 2021년 8월 20일.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절에 전우치 왕국이었다던 태인동에서는 감각 있는 4인방이 사부작사부작 즐거운 모험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런 저택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 더욱 궁금해진다. 건축가도 궁금하고. 집 주인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었을까? 70년대에 티브이를 들이고 80년대에 해외여행을 갔으니 친일파의 후손이거나 독재 정권과 야합했던 사람일 수도 있고, 머리가 비상한 엘리트일수도 있고, 앉을 때 양 무릎이 너무 벌어지지 않도록 하고 매일 깨끗이 면도하고 구두를 반질반질 닦고 여자에게 문을 열어주는 사람, 식당에서 포크나 나이프를 떨어뜨렸을 때 당황하지 않고 조용히 급사를 부를 줄 아는 사람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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