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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장애였을까.

by nay

가끔 TV나 인터넷 등을 통해 모 연예인이 공황장애 때문에 고생하고 힘들었던 얘기를 접한 적이 있다. 그 때만 해도 공황장애란 것이 무엇인지 관심도 없었다. 나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론 ‘그래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연예인 하면서 참 스트레스를 많이 받긴 하나보다’ 정도로만 나름의 결론을 내렸었다.


재작년말 영국에서 학회가 있어 다녀올 일이 있었다. 2박 3일의 비교적 짧은 일정이었는데 유럽으로 출장을 이렇게 잠깐 다녀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처음 가 본 학회였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랐고, 그만큼 얻어오는 것도 없어 내내 우울했다. 날씨는 유난스러울만큼 우중충 해서 단 하루도 햇볕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렇게 학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는 거다. 숨도 턱턱 막히는 것 같고 뭔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나를 엄습했다. 억지로 잠을 청하려고 눈을 감아도 마찬가지. 오히려 눈을 감으면 더 답답해졌다. 심호흡을 해봐도 잠시 나아지는 것 같다가 또 같은 증상의 반복. 비행기 안에서 내리고 싶은 충동이 막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 이러다가 큰 일 나지 않을까? 하는 그런 두려움. 숨이 멈출 것만 같았다.

그렇게 몇 시간을 안절부절 못하는 상황으로 버티고 겨우겨우 한국에 도착했다. 아마도 이것이 혹시 폐쇄공포증이나 아니면 내가 관심도 없어하던 ‘공황장애’는 아닐까.. 그런 생각을 갖게 만든 경험이었다.



그 이후 사실 그런 증상 그 자체보다, 그걸 또 다시 겪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계속 나를 괴롭혔다. 실제로 영화관에 가면 불이 꺼지고 영화가 막 시작하려는 순간, 또는 아주 어두운 장면.. 이런 경우에 비행기에서 처럼 답답함이 나타나곤 했다. 다행이라면 비행기에서는 당장 내릴 수가 없지만, 적어도 영화관은 그 곳을 탈출 할 수 있다는 안심 같은 것? 이렇게 글을 적는 지금은 아무렇지 않지만 그 당시는 그 곳이 영화관이든 아니든 이루 말할 수 없는 가슴의 답답함과 숨막힘을 이겨낼 방도가 없었다.


그러다가 또 비행기를 탈 일이 생겼다. 작년 초 가족 여행을 해외로 가게 된 것이다. 사실 이 때만 해도 반신반의 였다. 설마 또 그럴까? 하는 막연한 기대 반 두려움 반. 그러나 비교적 짧은 비행에서도 순간순간 여지 없이 그 때의 경험을 다시 겪었다. 그리고 놀러가서 케이블카를 타고 산으로 올라가는 도중에도 또 그 느낌. 너무나도 답답한 마음에 그 자리를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은 충동.. (글을 쓰는 지금도 당시 느낌이 되살아 나는 것이 싫다).

누군가에게 이런 나의 증상을 말할 수가 없었다. 아내에게도 괜한 걱정을 주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결국 여행 후 고민 끝에 털어 놓았는데, 오히려 그 이후에 조금은 더 나아진 것 같았다. 숨기고 혼자만의 고민으로 가져가기 보다 고백을 하니 고해성사 한 느낌이었다.



작년 여름에 또 출장을 갈 일이 생겼다. 이번에도 유럽이다. 숙소며 비행기, 그리고 그 곳에서 만날 사람과의 미팅까지 다 잡아 두었는데 막상 떠날 날이 다가올 수록 두려움이 커져갔다. 이번에는 가기 전에 (떠올리기도 싫었지만) 그 당시 상황들을 일부러 simulation 해 보았다. 그리고 그걸 참아내거나 극복할 수 없다면 아예 비행기를 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공항에서는 태어나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우황청심환을 하나 샀다. 이걸 먹으면 몸이 좀 나른해 진다는 말을 들은게 기억이 났다.

비행기를 타기 시작하는 Gate 앞에서까지 나는 갈등을 겪어야 했다. 비행기를 타도 되는건지, 정말 견딜 수 있을지.


그러나 생각보다는 최악의 상황이 펼쳐지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얼마 전 출장을 다녀왔다. 이번엔 미국. 10시간 가량의 비행을 참을 수 있을까.. 몇일 전 부터 다시 걱정이 앞섰다. 지금이라도 모든 일정을 취소한다고 하면 안될까, 무슨 일이 있다고 할까, 아니면 솔직하게 나 이제 비행기 못탈 것 같다고 해버릴까. 침대에 누워 많은 생각을 하다가 과거의 경험을 떠올렸다. 그 생각을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비행기를 타지 않았다 해도) 유사한 느낌은 그대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신기했다. 어느 순간 엄청난 가슴의 압박이 느껴졌는데, 이후 모든 것이 좀 더 편안해졌다. 뭐랄까, 미리 체험해 버림으로써 면역을 갖게 된 백신을 맞은 느낌?


그리고 아주 무사히 이번 출장을 다녀올 수 있었다. 스스로도 신기했다. 아내도 이제 잘 극복한 것 같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나의 (아마도) 공황장애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증상은 끝난 것일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나는 여전히 가끔 그 불안을 체험한다. 그 순간은 정말 참기가 힘들다. 극도의 긴장과 가슴의 답답함, 그리고 끝날 것 같지 않은 불안함.. 겪어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글로 적은 몇 마디의 형용사들이 전달해 주기 힘든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출장을 잘 다녀올 수 있었던 것에 위안을 삼는다. 적어도 '극복하고 있는 중'이라는 긍정적 생각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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