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KIRD에서 ‘연구자의 기획과 발표’ 주제에 대한 강의를 한 뒤, 학습자들에게서 다음의 내용으로 피드백을 받았었다.
강의준비를 많이 해 오신 것 같고 전달력이 좋았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다만 같은 연구자여도 정부출연 연구소의 R&D 기획과 기업 R&D가 다르다 보니, "강의 내용을 현업에 바로 적용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연구기획 실습이 포함되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등의 의견도 있었습니다.
강연 섭외를 했던 담당자는 비록 강연자와 학습자가 처한 상황(일반 기업 vs. 정부출연연구소)이 다르긴 하지만, 적어도 연구 기획이라는 큰 틀과 발표의 본질은 비슷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강연을 준비하고 실행했던 나 또한 섭외 담당자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당연히 서로 다른 처지에 있기에 공감을 얻어내는데 한계가 있을 것이라 짐작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우려는 현실로 확인되었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그래서 이후 추가적인 강연 초대는 없었다는 안타까운 결말).
이론적인 이상향과 현실적 고민 사이의 갭은 일반 기업과 정부출연 연구소처럼 배경이 다른 집단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같은 회사 안에서도 생기게 마련이다. 특히 연구 전략을 설계하고 연구소의 전반적인 운영을 담당하는 중앙부서에서 일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현장의 상황을 무시하고 이상적인 그림을 내세우기 쉽다. 보통 전략 부서는 ‘일하는 방식’을 변화시키려는 의도가 크다. 일하는 방식은 조직의 ‘문화’라서 여간해서 바꾸기 어렵다. 그만큼 중요하고, 그래서 도전적이며, 반발이나 저항 또한 심하다. 문화가 되었다는 건 구성원 사이에서 고착화된 결과물이라는 얘기니까.
브랜드나 마케팅과 밀접하게 닿아 있는 현업은 당장 눈앞에 놓인 숙제를 해결하는데 바쁘다. 게다가 연 단위의 평가 제도는 결국 한 해 농사를 잘 지었냐 못 지었냐로 판가름 나는데, 농사의 결과물은 특정한 제품의 매출이나 수익 구조가 연계될 수밖에 없다. 더 노력하고 힘들여도 바뀔까 말까 한 문화의 변화를 꾀하기보다, 눈앞의 성과에 집중하는 걸 이해해야 한다. 그러니 이상적인 건 교과서에나 나오는 얘기라며 실행을 해야 할 부서에선 볼 맨 소리를 하게 된다. 현장의 목소리를 우선하다 보면 막상 달라지는 것이 별반 없어 보이게 된다.
이런 현실적 문제를 타협하는 방안으로 연간 달성 목표에 ‘변화 관리’를 슬쩍 끼워 넣음으로써 (사실은 강제하는 형태지만), ‘서로 해야 하는 숙제’를 내주는 것이 이상과 현실의 중간 지점쯤을 만족시키는 형태가 된다. 그리고 일하는 방식은 쉽게 빠르게 바뀌거나 고쳐지는 것이 아닌 만큼 중장기적 전략과 인내심이 있어야 한다. 일 년만 해보고 그만 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리더십에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고 밀어붙여야 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
대학생이던 누나가 입시를 준비하던 내게 응원의 편지를 써 준 적이 있다. 유독 한 가지 잊히지 않는 건, ‘호랑이를 그리려 하다 보면, 고양이라도 그릴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땐 ‘꿈을 크게 가지라’는 교훈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회사라는 조직에서 일하다 보니 호랑이라는 목표를 구체적으로 잡는 것도 쉽지 않고, 고양이든 호랑이든 아니면 다른 형태의 무엇이든,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과 그림 그리는 방법을 구체화하는 것도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상적인 방향으로 구성원을 이끄는 전략과 세부적인 실행 안은 그래서 더 세심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세심하고 구체적이려면 현장을 잘 알아야 한다. 교과서에는 실리지 않은 ‘우리 조직의 실제 모습’을 이해하면 적용 가능한 방법이 더 정교해진다.
원래 본업으로 연구 전략과 운영에는 멀리 있었던 과거의 현업 담당자였던 나는, 가능한 현장의 감각을 잊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나도 어느 순간 판단을 하고 누군가를 설득해야 할 때는 현재 업무 부서인 전략 부서의 입장을 대변하게 된다. 그러나 현장에서 열심히 뛰고 있는 담당자들을 단순한 상황 논리만으로 설득하고 싶지 않다. 또한 내가 가지고 있는 현업의 경험을 살려 가능하다면 이상과 현실의 중간 지점을 잘 만나게 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적절한 줄타기를 하려는 욕심이 지나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현업의 목소리를 가장 잘 대변하기에 좋은 위치의 장점을 놓치기 싫은 까닭이다.
전략은 이상에서 시작하지만 현실에 발을 딛고 구체화되어야 한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메우는 힘은, 현장의 언어를 무시하지 않는 기획에서 나온다. 둘 사이의 균형 속에서 전략적 운영안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호랑이를 그리려다 어쩌면 고양이라는 결과를 얻더라도, 우리 조직에 어울리는 고양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