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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는 말보다 필요한 말

by nay

중요한 회의를 하나 끝내고 나니 상무님의 숙제가 떨어졌다.

“지금 이 프로젝트를 강력하게 끌고 가는 사람(부서)이 없네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정리해 주세요”

살짝 화가 난 상무님의 요구는 정당했다. 프로젝트의 직접적인 참여자면서 그 안에서 작은 그룹을 리딩하고 있는 나 역시 안 그래도 답답한 면이 있었다. 담당의 눈높이에서도 그러한데 당연히 상위 리더는 오죽 답답했을까 싶다.


어떤 일이 발생하고 그것을 보완해야 하는 보고서/제안서가 마련되는 순서는 보통 이렇다.

현황 파악 - 시사점 발굴 - 대안 제시


현상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것은 쉽다.

데이터를 모으고 자료를 찾으면 된다. 현재까지 일어난 일의 Fact를 알아본다. 초보자라면 시간의 순서로 정리하거나, 본인이 찾은 순서로 나열할 수 있겠다. 중급자 이상이라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선순위로 올려서 정리한다. 현상을 알아내는 것 이상의 보고서가 되기 위한 다음 작업은 ‘문제의 원인’을 알아내는 것이다. 특히 현실과 이상적인 상태를 비교하여 차이를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 이에 따라 현재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이 괜찮은지 아닌지는 객관화된 결과로 정리가 된다.


시사점은 의도가 반영되어야 한다.

의도의 반영 1 - 중요한 것 먼저.

앞에서 분석한 현실-이상 사이의 갭에 존재하는, 해결이 필요한 많은 것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1보 전진을 위한 2보 후퇴’란 표현이 있듯이, 적당히 무시하는 부분도 있어야 하고, 일부 사안에 대해선 일단 참아내는 미덕을 발휘하는 경우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일이 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최우선에 두면 해결할 문제의 우선순위가 제법 선명해진다.


의도의 반영 2 - 의사결정권자의 관점.

앞서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고 했다. 때로는 중요한 것 안에도 1순위와 2순위가 있(을 수 있)다. 그걸 결정하는 정점은 당연히 의사결정권 자다. 보고를 받고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원하는 바를 간파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글의 처음에 상무님이 말한 내용을 기억하는가? ‘프로젝트를 끌고 가는 누구’를 명확하게 하자고 했다. 그러니 명확하게 그 내용이 눈에 딱 들어올 수 있게 작성하는 것이 맞다.


의도의 반영 3 - 제안자의 시선.

의사결정권자의 마음에 들게 보고서를 쓰는 것이 정석이지만, 거기에서 그치면 보고자 스스로도 좀 기운이 빠진다. 단지 상사의 마음에 들자고 기획하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고를 하는 제안자의 시선을 슬쩍 끼워 넣을 수 있다. 의사결정권자의 마음을 우선 헤아리는 시사점은 기본으로 넣고, 나(보고자)의 제안이 있다면 이와 잘 어울릴 수 있도록 시사점을 잘 정리할 수 있다. ‘프로젝트의 구체적 드라이버’를 제안할 때, A부서나 B부서 중 누군가를 선택할 수 있다. 또는 보고자 입장에서 분석해 보니, 프로젝트를 끌고 가는 사람을 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리더십 레벨에서 공감대 형성이 우선되어야 할 수도 있다. 보고자 입장에서 보이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을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자연스럽게 꺼내는 것도 필요하다.


대안/액션플랜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어렵게 느끼는 부분이다. 액션플랜을 작성하다 보면 ‘좋은 말’로 시작해서 ‘맞는 말’로 끝나게 된다. 이런 게 필요하다, 저렇게 해야 한다는 당위성만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보고를 받는 사람은 ‘그래 맞는 말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대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를 듣고 싶어 한다. 상사가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라, 그도 뾰족한 생각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좋은 제안은 ‘언제까지 누가 어떻게 무슨 일을’이라는 구체성이 따른다. 잘 알면서도 그렇게 정리가 안 되는 이유는, ‘막연하기 때문’도 있고, ‘책임져야 하는’ 이유도 있다. 대안이 구체적으로 슥슥 떠오를 정도라면, 이미 그렇게 하고 있었을 것이다. 답이 없다 보니 일단 되는대로 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런 막연함을 구체화하는 것의 어려움은 ‘안 해봐서 모르는’ 이유도 크다. 경험이 있어야 구체성이 더해진다.


책임에 대한 두려움은 누군가 책임을 지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일이 진행되려면 책임이 뒤따르는 건 당연하다. 현업 부서와의 관계나 중간자로서 입장을 가진 보고자의 생각과 눈높이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대의적인 제안'으로 구체화되는데 한계가 있다. 제안 내용은 상사의 눈높이에서 이해되고 결정하는 것을 알기에, 어쩐지 다른 사람(부서)에게 책임을 넘기는 것 같은 뉘앙스의 보고는 부담이 된다(이것저것 헤아리다 보면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내용으로만 가득 찬다).


그러므로 맞는 말보다 듣고 싶은 말, 필요한 말을 끄집어내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럴 때 보고서의 완성도는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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