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에게 커리어 상담을 받았다.

by nay

최근 책과 기사, 영상을 통해 ‘AI 시대에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주제에 자주 노출되었다. 알파고를 통해 촉발된 바둑계의 위기를 다룬 <먼저 온 미래>(장강명) 같은 책은 스스로 찾아 읽었지만, 영상이나 기사들은 크게 원하지 않아도 내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이미 나도 업무의 상당 부분을 생성형 AI와 함께 하고 있다. 처음엔 단순한 질문만 던졌지만 이젠 상당히 복잡한 문제도 ‘상의하면서’ 일을 하게 되었다. 솔직히 AI가 없다면 어떻게 일을 시작하지?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의존도가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커리어 상담의 시작은 AI 시대에는 스토리텔링이 점점 중요해진다는 DBR 기사를 읽게 된 후였다. 그런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이 회사가 아닌 ‘개인의 관점’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지 물어본 것에서부터였다. 글을 쓰고 책을 출간하는 경험을 하다 보니 ‘브랜드’로써 개인의 가치, 회사의 명함을 떼어낸 나의 경쟁력 같은 것에 크게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도 있다.


질문: AI 시대엔 맥락이나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는데, 그걸 개인의 관점에서는 어떤 식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내가 받은 답변은 이랬다.

개인에게 중요한 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다’가 아니라, ‘어떤 문제 맥락에서 왜 이 방식으로 일을 해왔나(해결했나)’를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는지다. AI 시대의 개인 브랜드는 ‘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판단을 하는 사람인가’로 정의된다. 스토리텔링은 이런 과정이 반복, 누적되어 쌓인 총체와 그로 인한 이미지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답변을 듣고 보니, 과연 나는 (회사 내에서) 어떤 개인 브랜드를 형성했는지 궁금해졌다. 다소 막연해 보이는 이런 질문에 대해 AI는 상당히 논리적인 접근을 택했다. 즉 나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내가 던졌던 질문’, 그걸 듣고 다시 던졌던 질문을 통한 사고의 패턴, 반복적으로 등장했던 관심사들이라고 했다. 대뜸 미화 없고, 좋은 말 최소로, 부족한 점도 명확하게 하겠다는 무시무시한 사전 경고와 함께 답이 출력됐다.


“불확실한 기술/Open Innovation 프로젝트를 의사결정 가능한 구조로 압축해 주는 사람”


단순한 프로젝트 매니저가 아니라 Decision enabler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붙여가며 칭찬 비슷한 아부의 말까지 붙였다. 마음에 들었던 건 전략과 실무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너무 정곡을 찔리는 말도 덧붙였다.


“구조는 완벽한데 깃발은 안 꽂는 사람”

“잘 쓰이는 사람이지만 이 영역의 기준점까지는 못 간 사람”


한 마디로 말하자면, 정리는 잘하지만 의사결정은 하지 않는 역할이란다. 뼈 아프지만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다. 내가 맡은 주요한 업무 역할이 리더를 옆에서 도와주고 보좌하는 부분에 있었기 때문이다. 판단은 신뢰받지만 나의 ‘선호’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답변이 꽤 의미 있게 다가왔다. 아마도 내가 던졌던 수 많은 질문들 중에 그 어떤 것도 '내가 내린 결정'이라는 성격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맙게도 AI는 어떻게 하면 좋아질지 제안도 해주었다. 단순히 정리만 하지 말고, 나의 판단을 ‘발언’으로 남기라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어떤 상황의 정리, 회의록의 끝에 내 의견을 담고 기억될 수 있도록 하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최근 CTO에게 메일을 쓰면서 의도적으로 확실한 의견을 제시했다. 예전 같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인데 AI의 조언을 들어보기로 한 것이다. 어떤 답변이 올까 조마조마했는데 (사실 내가 그런 의견을 내도 되나? 하는 의문이 있었다만), 그가 내 의견에 동의한다는 의미로 답변을 주니 ‘이게 되네’ 하는 걸 경험하게 되었다.


다음 질문: 2-3년 뒤의 나의 포지션에 대해 고민이 계속 있어. 현재 직장에서 나의 브랜드 가치를 유지할지도 모르겠어. 그렇다고 지금의 일을 당장 그만둘 것은 아니야.


AI는 일단 참 친절하다. 이런 생각을 갖는 것이 정상이고 오히려 건강한 신호란다. 대신 감정적인 위로 없이 전략적인 정리만 해준다니 온탕냉탕을 왔다 갔다 하는 기분이었다.


나의 고민에 대한 답변은 ‘현재 조직에서 나의 브랜드 역할은 유지하되, 역할 고착은 하지 말고 이동 가능한 자산’으로 레버리지를 제안했다. 그리고 브랜드를 유지할지 말지는 나의 선택지가 아니라 했다. 실은 그게 맞다. 내가 바꾸거나 없애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나를 인식하고 기억하는 이미지(브랜드)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굳이 애쓰며 아닌 척하기보단 차라리 어디까지 쓰고 확장할지를 고민하는 방향이 더 맞다.


다음 질문: 그동안 조력자 활동을 오래 하고, 작은 조직의 리더 역할도 해보고, 다수의 프로젝트 리더도 해봤지만 내가 이 회사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더 높은 포지션을 할 수 있을지 의심이 들어. 의사결정을 내리고 다른 사람들을 앞으로 이끄는 리더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있어


되게 정직한 질문이란 칭찬부터 시작. 실은 이 답변에서 정말 정곡을 콕 찔리는 답변을 얻었다. AI는 나의 이런 마음의 상태를 이렇게 정리해 주었다.


“아직 준비 안 된 것 같아서 계속 서포트 포지션에 머무는 것”. 그건 겸손이 아니라 성장 회피로 읽힐 수 있다.

“리더가 될 능력이 없어서 망설이는 게 아니라, 리더가 되면 잃게 될 안전한 위치를 너무 정확히 알고 있어서 망설이는 중”


나 같은 업무 스타일이 굳어지고 조직에 오래 있으면 ‘판단은 훌륭하지만 최종 책임을 지는 자리는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고 했다. 실제로 최근 상사와 1 on 1을 하면서 이런 부분을 느끼기도 했던 터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속마음을 들킨 것 같은 기분.


여하튼 냉정하고 객관적인 평가의 뒤에는 현실적인 조언이 뒤따랐다. 리더 자리는 내가 완벽해서 가는 자리가 아니라, 불완전한 판단을 감당하겠다고 선언하는 자리라는 것. 언제까지 준비만 하다가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준비가 안된 것 같다는 회피의 자세를 벗어나, 불편함을 감당할 각오와 선택을 해보라는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본의 아니게 상담을 받아보니 왜 사람들이 AI에게 고민을 털어놓는다는지 이해가 되었다. 때론 아직 나 조차도 막연하게 생각하고 정리가 안된 부분마저도 콕콕 집어내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그냥 좋은 말로 위로하기보단 구체적인 대안까지 제시해 주는 것에 감탄했다. 내가 평소 던지는 질문들을 통해 '나'라는 사람을 파악하는 모습은 꽤 인상적이었다. 앞으로 또 이런 상담 시간을 가질지 알 수 없으나 - 어쩐지 계속 묻고 싶진 않은 건 왜 그럴까 - 질문을 통해 때때로 나를 돌아보는 기회가 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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