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실에서 발표가 끝났다. 발표자는 분명 열심히 했는데, 경영진의 표정은 어쩐지 싸늘하다. "그래서... 이걸 왜 하는 건가요?”
정기적으로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점검하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제안하는 활동이 있다. 프로젝트 매니저 역할을 하고 있는 나는 점검과 제안이 잘 될 수 있게 프로젝트 리더와 함께 일을 꾸린다. 그렇게 2년 넘게 수차례 미팅과 그보다 더 많은 사전 작업을 겪어보니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그건 연구원들이 의외로 맥락을 잘 설명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더 정확하게는 못하는 경우도 있고 안 하는 경우도 있다).
사실 연구자들은 논리와 맥락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논리적인 흐름으로 내 일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가장 많이 발현되는 기회는 바로 논문을 쓸 때다. 논문이야 말로 가장 논리적이고 데이터에 근거한 설득력 있는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연구자들의 발견과 배경 지식으로 내 연구의 필요성을 드러낸다.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실험방법을 도입하여 연구를 진행하며, 그에 대한 결과를 차례대로 전개시켜 최종적으로 내가 세운 가설이 얼마나 잘 증명되었는지 남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논문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회사 일에서 발표 자료를 보면 맥락이 없는 - 아니 사실은 맥락이 없어 보이는 - 내용들이 너무 많다.
왜 그럴까. 정말 맥락 없이 일을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결과인가. 여기서 말하는 ‘맥락’은 회사 일로써 그것이다. 만약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시작하더라도 회사와 관련되면 어떻게든 연결점을 찾을 수도 있다. 그것마저 어려우면 정말 나중에 왜 했는지를 제대로 설명하고 설득하기 어려워진다. 또는 처음엔 분명한 의도가 있었지만 진행하면서 새로운 발견과 궁금증이 생겨 나도 모르게 길을 잃는 경우도 가끔 있다.
그러나 여러 프로젝트를 리뷰하고 제삼자의 눈으로 바라보다 보니, 대부분 맥락을 리더 혼자서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내 머릿속에는 다 들어있는 것처럼 남들도 그렇게 이해하고 따라올 거라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리뷰 자료의 중요한 맥락(왜 이걸 지금 해야 하는지, 회사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은 사라지고 그저 (경영진이 보기에) 의미 없는 데이터의 나열만이 있을 뿐이다.
맥락의 시작은 바로 why일 것이다. 대체 이 일을 왜 시작했는지가 명확하지 않으면, 나중에 받게 될 많은 질문들을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
일반적인 연구자의 성장 과정을 살펴보면, 자신의 연구 테마를 결정하게 되는 이유는 보통 ’ 석박사 시절에 근무하던 연구실에서 원래 갖고 있던 테마에서 파생하거나, 그 와중에 흥미로운 것을 밝히고 싶다는 이유가 많을 것이다. 연구는 호기심에서 시작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지나 보니 회사의 일은 명분이 중요하다. 회사의 연구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명분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why이고, 그게 이 글의 주제인 맥락이 되는 셈이다.
아까 논문 쓰기야 말로 맥락 있는 논리적 글쓰기라고 했다. 그런데 실제 논문을 쓰는 과정을 잘 뜯어보면, 회사에서 요구하는 맥락과 서사가 중심이 아닌 부분이 있다. 보통의 연구는 ‘과거 연구가 있었고, 무엇이 밝혀졌고, 미지의 영역은 무엇인데, 나는 그 미지의 영역에 대해 가설을 세움’이라는 다소 단순한 구조의 서사가 전개된다. 이후 가설을 어떻게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명했는지 보여주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물론 이 연구의 의미를 설파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걸 통해 앞에서 보였던 단순한 서사 구조가 크게 확장되긴 쉽지 않다.
문제는 연구자가 논문 방식으로 생각하고, 회사는 다른 방식으로 묻는 데 있다.
회사 연구가 가져야 할 맥락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고객과 시장에 대한 배경, 왜 우리가 이 연구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 다른 회사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비교, 이 프로젝트가 어떻게 회사에 기여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상상과 가능성, 여러 부서가 어떤 식으로 함께 일할지 설계와 조율, 프로젝트 결과물이 언제 세상에 나오는지 기간은 적당한지, 그게 마케팅적으로 소통하는데 어려움은 없는지 등.. 일반적인 학술적 연구의 단순한 초기 내러티브보다 더 복잡하고 복합적인 요소들을 시작점에서 고려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아니 그냥 기술 개발의 이유만으로는 왜 설득이 안되는 건데?라는 자괴감에 빠질 때도 있다.
어쩌면 연구원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현상에서 시작해서 맥락을 연결하고 그에 맞는 적절한 대응 방안을 다루는 콘텐츠의 정리는 회사의 어떤 종류 일에서든 다 갖춰져야 할 부분이 아닐까 싶다.
현실적인 조언을 해보자면, (리뷰에 참여하는 경영진 같은) 남들도 나만큼 알고 이해할 것이란 생각을 잠시 내려놓으라는 점이다.
2년 넘게 프로젝트 리뷰를 옆에서 지켜보며 하나 깨달은 게 있다. 맥락은 내 머릿속에 있을 때는 아무 힘이 없다. 꺼내서 상대 앞에 놓아야 비로소 작동한다. 내가 100을 알고 있어도, 상대가 10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발표는 실패다. 결국 맥락을 챙긴다는 건, 내 일을 잘 설명하는 기술이 아니라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번역은, 의식적으로 하지 않으면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