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해보는 일의 가치

by nay

혹시 누군가 나에게, 당신은 무엇하는 사람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연구직 회사원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여기서 방점은 연구가 아니라 회사원이라는데 찍힌다. 실은 연구자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실제로 연구실을 떠난 지 오래다. 실험을 했던 기억은 저 멀리 있다. 혹시라도 다시 실험 테이블에 앉아 일을 할 모습을 그려보면 잘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내 마음 속 어느 한 구석엔 ‘연구자’의 마인드가 깊고 단단하게 들어앉아 있음은 분명하다.


연구라는 현업에서 손을 놓은지 오래임에도 연구자라는 정체성을 놓지 않았다고 믿는(혹은 주장하는) 이유는, 나의 일하는 방식에 깊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긴 시간 학위 과정을 거치며 온전하고 독립적인 연구자가 되는 길을 배웠다. 다양한 실험의 도구들을 능숙하게 다룬다거나 시료를 다루는 섬세한 스킬을 익혔다. 그러나 내가 배운 중요한 내용 중 하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실험의 계획을 잘 세우는 일이었다.


상대적으로 단순한 과정으로 이루어진 실험이 있는 반면, 어떤 실험은 단 하나의 스텝만 꼬여도 몇 시간, 몇 일 또는 몇 주가 걸린 시간이 무색하게 결과를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실험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진행할지 충분히 고민해야 한다. 물론 설계한대로 실험의 각 단계를 밟아가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야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으니까.


계획한대로 실험을 진행했다고 해서 결과가 꼭 원하는대로 나오리란 보장은 없다. 결과는 불확실하지만, 그래도 불확실성의 경계는 비교적 분명하다. 내가 설계한 조건 안에서만 흔들린다. 변수는 많아도 변수의 목록은 내가 쥐고 있다. 계획을 충분히 세웠다는 사실만으로도 실패를 견딜 수 있다.


하지만 회사 일의 계획은 치밀하게 세우되, 실행은 그냥 해야 한다.

보통 실험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그리고 통제할 수 있는 조건 아래서 진행할 수 있다. 실험의 주재료인 세포는 말이 없다. 내 손 위에서 다룰 수 있다. 그러나 회사의 일은 실험과 달리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경우가 훨씬 많다. 실험실에서 배운대로 행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회사에서 일을 하는 것은 많이 달랐다. 계획에 너무 많은 애를 쓰다보면 정작 실행에 지치는 경우가 생긴다.


의외의 변수가 생기고, 계획한대로 사람들은 따라주지 않는다. 다양한 부서와 이해관계자들의 역학 관계도 이해해야 하고, 눈치도 살펴야 한다. 어쩌면 애초에 계획 따위는 무용한 것인지도 모른다(어떻게 될지 몰라도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 그나마 마음의 위안이랄까).


얼마 전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 업무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각자 가진 고충을 말하며 언제까지 끝내야 하는 공통의 과업에 대해 말을 할 때였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그냥 하는데요”


이렇게 말한 동료들 역시 연구원이지만 나와 다른 업무의 결과 경험을 가진 쪽이었다. 계획 없이 일을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도 당연히 실험을 하기 전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일의 성격 상 상대적으로 ‘몸으로 부딪혀 보고’ 그 안에서 해답을 찾아가는데 더 익숙함을 갖고 있다. 결과가 흔들리지 않도록 처음부터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지키는 과정 보다는,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현장에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더 많이 익혀온 셈이다.


내가 아는 계획이란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지키지 않을 계획이라면 왜 필요한가. 그걸 벗어나면 이미 머리 속은 하얘진다. 물론 이제는 여러 상황을 겪어보며 (내 기준에) 임기응변이라고 부를 수 있는 미덕을 조금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경로를 벗어나는 상황에 대한 불편함이 있다. 문제는 그런 불편함을 핑계로 계획만 세우고 말거나,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레 겁을 먹는다는 것이다. 그냥 해보면 되는데 그걸 피하고 있었다.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고 자책할 이유는 없다. 물론 계획한대로, 생각한대로 일이 진행되고 업무가 끝났을 때 짜릿함은 분명하다. 그러나 보통의 경우 내 맘대로 흐르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러니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아도 된다. 상황에 맞게 대처하고, 그 안에서 최선의 결과를 내기 위해 ‘일단 뭐라도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해보고, 피드백을 받고, 개선책을 내고, 다시 실행하고의 반복을 통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생각이 너무 많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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