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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KFAK Mar 02. 2016

에머슨과 소로의 고향

문명과의 거리


이 곳에 온 지 어느덧 6개월이 다 되어간다. 새로 이사한 이 동네는 미국의 작가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의 고향이자,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의 대표작 '월든 - 숲속의 생활(Walden)'의 배경인 월든 호수가 있는 곳이라고 한다. 보스턴에서 불과 4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는 데도 주변 곳곳에 크고 작은 호수들이 많고, 어딜 가나 울창한 나무들이 양 옆에서 도로를 감싸고 아치를 이루는 전원적인 곳이다.


작년 가을 처음 이 곳에 왔을 때, 울창하고 아름다운 자연과 그 속에 여백을 잘 살려 자리한 주택들의 생소하지만 정겨운 모습에 감탄하면서도 이전에 살던 곳과는 사뭇 다른 모습에 걱정이 됬던 것도 사실이다. 근처에 왠만한 한국 식료품은 전부 망라되어 있는 마트와 한국 브랜드 빵집, 소위 잔칫집이라 불리는 반찬가게와 한국 음식점들이 즐비한 곳에서 살다가 맛있는 한국 음식점은 커녕 레스토랑이나 가게 조차 많지 않은 이 동네, 연고라는 것이 전무한 이 곳에서 사는 것이 과연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기가 쉽지 않았다.


겨우내 오후 4시가 지나면 해가 지고, 어둑해지면 바로 나무 숲 사이로 찾아오는 조금 과하다 싶은 고요함, 부산하지 않고 한적하지만 늘어지게 한가하지도 않은 이 동네에 이제야 조금 적응이 된 듯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이 곳 생활 6개월에 접어든 요즘에서야 이 동네의 찬란한 유산 두 분의 작품을 읽어보는 것이 주민으로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월든’의 오두막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은 작가가 월든 호숫가에 홀로 오두막을 짓고 2년여 간 생활하면서 집필한 작품이다. 1800년대 당시 얼마나 입학 문턱이 높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버드에서 수학한 엘리트 문학도이자 이십대 였던 그가, 한창 나이에 한적한 동네에 외따로 조용히 자리잡고 있는 월든 호수, 문명과 수 킬로미터 떨어진 외지였을 이곳에 독거이자 칩거를 결정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궁금했다.



월든 호숫가 숲속 한켠의 나무판에 소로의 글귀가 적혀있다.
나는 의지에 따라 삶으로써 삶의 필수불가결한 사실만을 경험하고자 숲으로 갔다. 숲이 나에게 가르쳐 주는 것들을 배우지 못해 죽음의 목전에서 헛되이 살았음을 깨닫지 않기 위해.
                                                                      - 소로


무인의 숲에서 그는 무엇을 배우려던 것이었을까. 삶에서 문명을 배제하고 불필요한 것을 제외한 정수만을 겪고 싶다는 것은 불필요한 비교, 걱정, 혼란, 시간의 낭비 등을 자신의 삶에서 가감하겠다는 얘기가 아닐까. 결국 어떠한 삶을 살 지는 자신만의 선택이다. 시류를 따라서 죽도록 헤엄치다가 힘이 달려 가라앉게 되느니 물 밖에서 편안히 호흡하며 자연을 즐기는 것도 살아가는 한 방법으로써 능동의 선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만원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바쁜 도시 맨하탄으로 출퇴근했던 나는 도시 문명의 부산함과 (지리적인 거리는 별로 멀지 않지만) 느낌적 거리는 수 천 마일 되는 듯한 이 곳에서 생활하면서 시간의 빈 공간을 채우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글을 읽으면서, 비록 지금으로부터 1.5세기 쯤 전이었지만, 작가가 이 곳 생활을 선택하면서 얻게된 문명과의 거리는 그의 작품과 사상의 깊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랄프 왈도 에머슨이란 이름을 처음 접하게 된 계기는 에머슨의 잠언 때문이었다.

나에 대한 자신감을 잃으면 온 우주가 나의 적이된다.-랄프 왈도 에머슨


깊은 마음의 아픔을 겪던 시기에, 암전된 듯한 마음을 울리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와 아무 연고도 없고 현존하는 인물도 아니지만 그의 고향에 살게 된 것이 설레고 신기했다.


에머슨의 '스스로 행복한 사람' 중

"여행은 어리석은 사람의 낙원이다. 한 번이라도 여행을 떠나 보면, 여행지가 생각처럼 신기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집에서 생각할 때는 나폴리나 로마에 가면 그곳의 아름다움에 취해 슬픔을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가방을 싸 들고 친구들과 작별의 포옹을 하고 배에 오르지만, 결국 나폴리에서 그 꿈은 깨지고 만다. 바로 옆에 내가 피해온 분명한 사실, 변함없는 슬픈 자아가 그대로 버티고 있다. 바티칸과 궁전들을 찾고, 아름다운 풍경이나 상징에 도취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도취되지 않는다. 내가 어디를 가든 내 안의 거인이 나를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나에게 "내 안의 거인"은 윈스턴 처칠의 "검은 개"였다. 고통의 공간과 상황에서 물리적으로 벗어나도 없어지기는 커녕 반려견처럼 오랜 시간 함께 해오던 결코 무시될 수 없었던 존재. 그런데, 감사한것은, 요즈음 시간의 빈 공간과 현실과의 소원함을 통해 내 검은 반려견은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 밖을 나갔다가 늦은 시간 돌아오거나, 몇 일 동안 집을 나가 감감 무소식일 때도 많아졌다는 것이다.


어딜 가나 쫓아다닐 것 같았던 거인은 반복되던 상황에서 멀어져서 관조하다 보니 조금씩 작아져 보이기 시작했고, 그런 관조의 생활이 반복되다 보니 결국 희미하게 색도 바래고 빛도 잃게 된 것같다.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익숙한 환경을 떠나서 얻게 되는 경험이 낡은 사고를 새롭게 하고, 묵은 것들의 자리에 새로운 아름다움을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에머슨과 소로의 작품에 대해 앞으로 사견이나마 하고싶은 얘기가 많을 것 같다.


만 서른 아홉이 된 오늘, 오후 4시가 한참 지났는데도 밖이 아직 화창하고 밝다. 이제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고 있다는 걸 알려 주려는지. 해수로는 마흔 번째 해의 첫 날, 이제 자아 바깥에 있는 것들과 그 속에 내가 지키고 싶은 것들 사이에 서로 거리를 두는 방법을 터득 중이니까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흔들리지 않을, 불혹('不惑')을 살아나갈 준비가 어느정도는 되었다고 믿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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