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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영씨 Aug 01. 2019

크루즈 여행을 간 전직 크루즈 승무원의 소심한 일기

나에게 크루즈 여행이란?

크루즈 승무원을 그만둔 후 계획한 첫 크루즈 여행. 들뜬 마음으로 크루즈에 승선했지만 생각보다 기쁘지 않았고, 크루즈로 여행을 온 것이 불편했다.


과거 나의 직장이자 집이 었던 곳이었던 크루즈에 몇 개월 뒤 직원이 아닌, 여행자로 돌아온 나는 온전히 편하게 '내 집'처럼 즐길 수가 없었다. 과거의 '집'은 사실 크루즈에서 보면 저층, 즉 낮은 층으로, 크루들의 생활공간, 나의 캐빈이 있는 곳이 나의 집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집'은 고층, 내가 유니폼을 입어야만 돌아다닐 수 있었던 곳, 과거 4년간 나의 직장에 해당하는 곳인데. 그곳이 집이 된다는 건 단숨에 적응하기 쉬운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분명 나는 승객인데  습관처럼 처음 만나는 다른 승객들에게 "Hi, How are you?' 하고 먼저 인사를 건네질 않나.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보다 계단을 이용하는 게 더 편하지 않나. 더러운 바닥을 발견하면 게스트 서비스에 연락해서 보고하지 않나. 게다가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함께 크루즈에서 가족처럼 함께 살며, 일했던 동료들이 나에게 서빙을 하고, 내 방 청소를 해주는 게 영 불편하지 않나. 선덱에 비키니를 입고 누워있는데 앞에서 풀 파티를 한다고 동료들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승객들에겐 당연한 일이지만 나에겐 뭐랄까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어 풀 타월로 몸을 덮어버리질 않나. 내가 이러니 크루즈 여행을 제대로 즐길 수가 있겠냔 말이다.  


나의 첫 크루즈 여행인데 어느 곳에서도 마음 놓고 쉬지 못했던 나. 이대로 가다간 첫 크루즈 여행을 불편한 여행으로 남기고 마무리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고, 이런 내가 불쌍하기도 했다.


'헤이, 나영! 크루즈 왔구나!!! 재밌게 즐기고 있어?'

'뭐 필요한 거 있음 말해.'


하지만 동료들은 내가 크루즈로 놀러 온 상황이 전혀 불편하지도 이상하지 않은 듯했다. 오히려 아는 동료가 승객으로 놀러 와서 더 반갑고 기뻐했다. 크루즈 안에서 내가 동료들의 레이더 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더 챙겨줄 것이 없는지, 불편한 건 없는지, 몇 번이고 물어보고 챙겨주었다. 퇴근길 캐빈으로 돌아가는 길에 멀리 서라도 나를 보면 달려와서 안부를 묻고, 늦은 시간 남편과 둘만 남아 있는 바에서 퇴근시간이 훌쩍 지나도 내가 좋아하는 곡으로 피아노 연주를 해주며 자신의 옛 동료가 와서 함께 즐기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좋아했다. 그제야 얼었던 몸이 녹는 듯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나도 그랬을 것이다. 만약 나라도 내가 일하는 곳에 나의 동료가 온다면 더 챙겨주고, 행복하길 바랬을 것이다. 크루즈는 그런 곳이니까. 우린 그런 곳에서 행복을 배웠으니까.


그렇게 전 직장에서 여행 3일째가 되어서야 진정한 승객 모드가 되어 릴랙스를 할 수 있었다. 마음을 편하게 세팅을 하고 승객 모드가 되니 이 곳이 전 직장이었기에 주는 장점도 생기기 시작했다. 대극장이 어디에 있는지, 이 시간쯤이면 어디 가면 먹을 것이 있는지, 수영장에선 어떤 액티비티가 열리는지, 몇 시쯤 내려가야 텐더 보트를 여유롭게 타고 기항지 관광을 할 수 있는지.  일반 승객이었다면 컴퍼스를 보고, 게스트 서비스에 물어가며 알게 되는 것들인데 이 모든 것은 이미 나의 머릿속에 있었고, 몸이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승객이기에 보이는 크루즈의 서비스, 시설의 개선점, 불편함도 보이기 시작했다. 과거엔 승객이 찾아와 불편을 말해도 단순히 회사 시스템이 그러하니 이해해주십사 양해를 구했었지만, 내가 승객이 되어보니 실제로 꽤 불편하셨겠구나, 이해가 안될 만큼 불편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기도 했다. (결국 과거 승무원의 허물을 벗지 못하고 불편한 점들을 하나하나 적어서 본사에 메일을 보내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  


5일의 일정 중에서 소심하고 불편하게 생활한 첫 3일이었지만 , 마지막 2일은 거침없었고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동료들과도 물론 편해졌고(사실 나만 편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같은 다이닝 테이블을 쓰는 싱가포르에 사는 커플 하고도 친해져 공연도 같이 보고, 나이트클럽도 같이 가고, 하선하기 전에는 페이스북 친구도 맺으며 다음 크루즈 여행을 약속하기도 했다. 낮잠을 자고 싶으면 잤고, 남편과 맥주를 손에 들고 노을도 바라보았고, 선내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춤도 췄고, 다들 잠든 늦은 밤에 야외 자쿠지에 도란도란 미래의 우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칵테일을 마시며 공연도 보며.. 하.. 일일이 나열하기엔 끝도 없는 잊지 못할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5일동안 우리의 보금자리
밤의 크루즈는 바다위의 떠다니는 별같았다. 
선덱에 누워 영화를 보고, 맥주한 잔에 도란도란 나누었던 이야기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크루즈 승무원이 된 이유도, 승무원 생활을 하면서 자칫 지겨워질 수도 있을 이 곳이 아직도 나에겐 낙원인 이유도,  그리고 육지에 내려온 이후 내가 가장 힘들고 지칠 때 제일 먼저 생각나고 가고 싶은 곳이 크루즈인 이유도 다 여기에 있었다.  


행복을 사고파는 곳.

행복한 사람들의 커뮤니티.

크루즈는 그런 곳이니까.


나는 점점 승무원의 옷을 벗고, 승객으로, 행복을 느끼는 한 사람으로 크루즈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크루즈에 녹아들수록 느꼈다. 크루즈는 참 매력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나뿐만이 아니라 나의 주변 사람들도, 그리고 그들의 주변 사람들도. 점점 많은 사람들이 이 매력을 보고 느끼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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