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의 치유, 두 번째 방문
남편의 여름휴가를 맞아 지난번 좋았던 기억을 함께 나누고 싶어 6개월 만에 다시 비행기에 올랐다. 처음이자 혼자의 여행으로만 남겨두기엔 아쉬웠다.
하지만 도착 이틀 만에 우리는 여행 경비로 70만 원을 써버렸고 순간 멍해졌다.
‘우리가 이렇게 펑펑 쓰는 사람들이었나?’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음 반 당황 반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후로는 경비를 조심스레 아끼며 호화로운 일정 대신 산책과 수영으로 하루를 채웠다. 빽빽한 스케줄은 없었지만 오히려 여유가 남았다. 남편이 편히 쉬었다 가기를 바랐는데, 다행히 그는 "이번 여행이 정말 좋다"며 미소를 지었다.
특히 밤 수영을 좋아하던 남편.
고요한 수영장에 따뜻한 조명이 물 위로 부서지듯 반짝였다. 물살이 일렁이며 만들어내는 파동이 고요한 공기를 흔들었다. 남편이 어린아이처럼 물 위를 가르는 모습은 장난스러운 커다란 물개 같았다. ‘우리 집에 이렇게 수영을 잘하는 사람들이 많았나’ 싶어 피식 웃음이 났다. 나는 그 장면을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남편을 먼저 한국으로 보내고 나는 일주일을 더 남았다. 엄마, 언니와 맛집을 찾아다니며 웃음 많은 시간을 보내던 중 언니가 지독한 장염에 걸렸다. 고열에 식은땀을 흘리며 앓는 언니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밤새 곁을 지키며 열을 재었지만 도무지 내려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택시를 타고 응급실로 향하는 길.
너무나 불안했지만 오히려 차분하게 대처하려 애썼다. 30분이 세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괜찮아, 곧 괜찮아질 거야.’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지만 불안은 줄지 않았다. 언니의 몸을 일으켰을 때 그 뜨거운 열기가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는 듯하다. 사람의 몸이 이렇게 뜨거워도 되나 싶었고 바짝 마른 몸이 괜히 더 서글퍼 보였다.
아픈 언니에게 마음을 다 쏟고 싶었지만 한숨도 못 잔 피곤한 몸은 자꾸 무겁게 가라앉았다. 결국 나도 모르게 인색한 말이 튀어나올 때마다 스스로가 못마땅하고 미안했다. “그럴 거면 차라리 더 잘해주지…” 자책이 마음을 조여왔다.
그 미안한 마음을 나는 병원에서 묵묵히 4시간 넘게 기다리며 “힘들지?”라고 묻는 언니에게 괜찮다고 답해주는 것으로 또 잘하지도 못하는 영어 실력 때문에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못 알아들을까 봐 전전긍긍하며 챗GPT를 켜고 “저는 영어를 잘 못합니다. 천천히 말해주시겠어요?”라는 문장을 영어로 달달 외워두는 것으로 표현했다.
다행히 병원을 다녀오고 약을 먹은 뒤, 언니의 상태는 아주 천천히 호전되었다. 타국에서 아프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공포였다. 그나마 엄마와 내가 함께 있을 때 아팠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던지. 돌아가신 할머니가 도와주신 걸까, 괜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카들은 엄마와 함께 자고 나는 오랜만에 언니와 단둘이 잠을 잤다. 마치 결혼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20대 시절 함께 살며 티격태격하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땐 너무 당연했던 공기가 지금은 눈부시게 소중하게 느껴졌다.
언니는 크게 아플 때마다 내가 곁에 있어 마음이 놓인다며 “넌 내 베개 같은 존재야” 하고 웃었다. 순간 울컥했다. 생각해 보니 언니가 응급상황일 때마다 내가 곁에 있었다. 구급차를 탈 때도 기절하던 순간 언니의 머리를 받쳐주던 때도. ‘아, 이런 게 자매구나’ 싶었다.
그날 밤 우리는 오래도록 누워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민을 털어놓고 울다가 웃다가, 결국엔 서로의 마음을 꼭 끌어안은 밤. 그렇게 마음속에 또 하나의 단단한 기억이 새겨졌다.
그 시간을 지나고 나니 ‘이럴 때면 엄마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우리를 자매로 만나게 해 주고 서로 곁에 있어주기만 해도 괜찮다는 걸 알게 해 주었으니까. 결국은 엄마라는 울타리 덕분에 우리는 지금도 서로를 지탱하며 살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