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있을수록 더 많이 느껴지는 것들
뭐든 다해 주시는 부모님이다.감정은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항상 말해주시는 부모님 밑에서 나 역시 밝고 누가 봐도 사랑받는 아이의 모습으로 자랐다.이제는 사랑을 누구에게나 나눠줄 수 있는 대체적으로(?) 건강한 어른으로 자랐다. 나는 살면서 가끔 또는 자주 생기는 마음의 우울을 이겨내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 힘의 원천은 아마 든든한 부모님 덕이고 항상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나무 같은 엄마 덕인 거 같다.
내가 대학교 때 우리 집은 인생에서 가장 안정적이며 경제적으로도 여유로웠다. 아빠가 직장에서 가장 높은 직급으로 올라가고 나와 언니는 국립대학교에 입학해 문제 일으키는 일 없이 잘 지냈다. 갖고 싶은 건 망설이지 않았고 먹고 싶은 것도 언제든 먹으러 다녔다. 나랑 언니의 문화생활 눈높이는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그런데 엄마는 항상 같았다. 본인보다는 나와 언니 아빠의 것들을 먼저 챙겼고 본인의 물건을 살 때면 엄청난 고민 끝에 애장품이 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골라 구매했다.
그 후 4-5년..
아빠도 엄마도 퇴직을 하시고 우리 가족은 제2시즌을 준비해야 했다. 퇴직 후 아빠의 우울증과 엄마의 갱년기라는 작은 해프닝이 있었고 매년 갔던 해외여행은 이제 조금은 부담이 되었고, 매일 먹던 특식은 한 달의 두 번 정도 누릴 수 있었다. 그렇다고 가족들 모두가 이런 변화에 힘들었는가 생각해보면 전혀 아니다. 여유로웠을 때를 떠올리며 그때 당시 원 없이 행복했음 됐다고 가족 모두가 말한다. 조금 빡빡한 지금은 절약하며 가끔 즐기는 고급의 그것들(?)에 대한 재미를 느낄수 있어 행복하다 말한다. 잠깐 엄마 이야기를 하자면 여유로웠을 때도 그다지 여유롭지 않은 지금도 엄마는 항상 같았다. 여전히 오래 고민해서 물건을 고르고 한번 가진 물건은 몇 해가 가도록 깨끗하게 유지하며 사용했다. 집안에 짐들이 쌓일 일도 없었다. 구매하는 게 없으니 몇십 년 된 그릇이 가구가 어제 산듯 깨끗했다. 이런 엄마 덕에 평정심을 찾고 대대적인 긴축정책에도 가족 간에 맘상할일 없었다. 나도 어느새 직장인 5년 차가 되었다. 나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했었는데 본가로 다시 돌아와 직장생활을 했다. 그새 친할머니 외할머니 모두 나이가 들어 외할머니는 투석을 받아야 하는 몸이 되었고 친할머니는 치매가 왔다. 친할머니는 나와 언니를 맡아 키워주시던 분이다. 계속 같이 살고 있다. 엄마는 시어머니를 평생 모신 것이다. 어휴 대단해...
이런 상황들이 불과 5-6년 새에 일어났다. 나는 모든 상황에 그럴 수도 있지 어쩌겠어라는 마음을 빨리 먹을 수 있는 엄마 아빠의 나이가 아니라서 감정적으로 많이 힘들었었다. 누가 봐도 힘들어 보이는 엄마가 괜찮다고 할 때마다 난 더 힘들었다.
엄마의 엄마가 아프기 시작했을 때 엄마는 바로 간병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본인 가정을 돌봐야 한다는 강한 진념으로 월~금 까지는 서울로 외할머니 간병을 하러 갔고 토~일 까지는 우리가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정말 강했다. 아니 강해 보였다. 서울에 이모들이 4명이나 되는데 일을 하지 않는 주부라는 이유로 멀리 사는 우리 엄마가 맨날 원정 가서 간병을 하는 모습에 나는 정말 뚝배기가 몇 번이고 열렸다.
'아니 이모들은 뭐해? 엄마가 큰언니라고 다 맡겨?
솔직히 할머니가 밥해주고 빨래해주고 한 특권 누린 거 이모들 아니야? 진짜 무책임하고 은혜 모른다, 그리고 엄마한테 월급 줘야 하는 거 아냐? 그리고 우리 집이 이모들 자식(사촌동생) 교복 사주고 해마다 용돈 주고 한 거는 뭐야. 나는 진짜 제대로 받아본 적도 없는데. 그 이모들 편하라고 엄마가 희생하는 꼴이잖아.'
이거 정말 내뱉고 싶은 말이었는데, 가슴이 시키는 일 머리가 막았다. 엄마는 내가 열받아하는 게 보였는지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 앉아 걱정만 하는 거보다 내가 하고 맘 편한 게 나아. 몸 힘든 게 마음 힘든 거보다 백배 나아. 너한테는 이모고 나한테는 하나뿐인 동생들이야. 사랑하는 사람들 한텐 주고 받는거 계산 보다 몸이 더 먼저 움직여"
이게 뭔 소린가 했는데 간병일이 한두해 지나고 나니 깨달았다. 마냥 마이너스만 있는 일들이 아니었다. 슬픔에 덤덤 해질 연습과 이별을 맞이 할 준비 모두 엄마는 간병을 하면서 배우는중 같았다. 동생들(이모들)과의 관계는 엄마의 침묵의 희생으로 더욱 돈독해지고 있었다. 또한 외할머니를 간병하는 엄마의 모습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처음에는 울컥울컥 하는 슬픔이 묻어나고 전화 오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는 엄마 모습을 보았다면
지금은 해야 할 일을 하는 직장인 같아 보일 때가 많아졌다. 엄마는 이제 한주씩 격주로 서울에 올라가 간병을 한다. 나머지 한주는 치매노인이 돼버린 시어머니와 우울증을 겪은 적 있는 감정 예민한 아빠가 있는 집에 온다. 언제는 엄마와 산책하다가 우스갯소리로 내가 말한 적이 있다.
나 : "엄마 정말 진퇴양난인 거 같아. 할머니 또 세탁기 망가뜨렸어. 에휴."
엄마 : "나 오히려 여기 할머니는 신경거 슬리며 화나진 않는다? 그냥 소소한 짜증이 날 뿐이야. 감정을 우리 엄마 걱정하느라 다 써버렸어."
나 : "나 정말 나쁜 사람 같아. 사람이 아파서 저런다는 걸 금세 잊어. 출근해야 하는데 할머니가 매일 새벽마다 문 열고 이상한 이야기 할 때면 나 정말 화낸다?"
엄마 : "나 매번 생각해, 천국 가긴 글렀다고 하하하"
나 : "나도 그런 거 같아, 밖에선 온갖 다정한 척 친절한 척 다하는데 치매인 할머니랑 살면서 처음이랑 너무 달라졌어 내 말투도 행동도. 할머니한테는 세상 이렇게 냉정한 사람이 없어. 나도 천국 못가. 하하"
엄마 : "엄청 고단한데 너랑 이런저런 이야기하면 다 해소된다. 백가지 슬픔이 한 가지 기쁨으로 다 씻겨져 나간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하고 살아야 하는 거야. 네가 엄마 안 도와주는 거 같아도 이게 다 엄마 위로해주고 도와주는 거야. 고마워.
줄곧 힘든 일 슬픈 일만 있을 거 같아도 이봐 우리 웃으면서 산책하잖아.
섣불리 실망하면 안 되는 거야 삶은."
기쁨이 느껴지고 슬픔이 느껴지고 온 마음들이 고스란히 전달된다.어디서 본 적이 있는 거 같다. 딸들 인생 힘들어지는 방법 중에 하나 엄마를 연민하는 것.그런가... 그런 거 같기도 한데 어쩔 수 없다.
연민 말고 사랑으로 바꾸자, 우리 엄마 불쌍하진 않고 멋지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