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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행자보다 좋았던 자청의 글

나는 왜 진작 회사에 가지 않았을까?

특별히 정한 주제에 맞춰 책을 선정해 읽고, 에 대한 생각이나 깨달은 점을 꾸준히 블로그에 글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 글이 좋았다. 내 글에 대해, 또는 내가 읽은 책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누군가 내 글을 읽어주고 반응을 해주기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블로그 세계를 탐험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블로그를 만들기 위해 따라야 하는 공식 같은 게 있는 것 같았다. 1일 1포 하기, 클릭하게 만드는 제목 정하기, 읽기 쉽게 특별한 형식으로 쓰기, 그리고 서로이웃 수 늘리기 등등. 왠지 그래야 할 것 같다는 느낌으로 무언가를 쫓듯이 블로그 세계를 정처 없이 떠돌다 보니 어느새 내 블로그 메인에는 '경제적 자유'나 '디지털 노마드', '전자책 만들기' 등등에 관련된 글들이 넘쳐났다.



그러다 자청님의 블로그를 알게 되었다. 최근 글에서부터 오래된 글까지 푹 빠져 마구잡이로 읽었다. 확실히 흡입력 있는 글들이었다. 경제적 자유에 앞서 책 읽기와 글쓰기를 강조하는 점도 좋았다. 많은 블로그들을 내 목록에서 지워나갔지만 자청님의 새 글은 종종 방문해 읽었다. <역행자>를 기획하는 모습도, <역행자> 책이 실제로 출간되는 모습도, <역행자>가 입소문을 타고 서점에서 1위를 차지하는 모습도, 그 이후에 또 이런저런 일들을 시도하는 모습도 자청님의 블로그를 통해 실시간으로 지켜봤다.



하지만 깊은 인상으로 나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는 글은 따로 있었다. 바로 '왜 작가, 교수님은 매일 글쓰기를 하는데 경제적자유가 없나요?'라는 글이었다. 평생 글쓰기를 하고 책을 읽는 교수님들이나 철학자, 문학적 글쓰기를 하는 작가들은 왜 경제적 자유를 얻지 못했냐는 질문에 대한 자청님의 생각을 담은 글이었다.



자청님이 생각한 그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들은 돈을 버는 것보다 다른 곳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다. 내적인 성찰이나 지적 추구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 자신만의 결과물을 내는 데에서 보상을 받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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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즈음 나는 매일같이 눈에 들어오는 글들을 읽으며 '경제적 자유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 내가 어리석은가?' 하는 생각 조금씩 초조해지고 있었다. 당장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돈이 많이 되는 일도 아닌 연구를 하고 있다. 블로그를 하는 시간도 경제적 자유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으로 만들 수 있을 텐데 내면을 탐구한다는 명목으로 남들이 관심도 없는 글이나 쓰고 있다. 나는 현실을 파악 못하고 허송세월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내 주변을 돌아보면 '경제적 자유'를 얻기 위해 해야 한다고 인터넷에서 말하는 것들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없었다. 아니면 내가 보지 못하는 것뿐이었을까? 연구자면 연구를 잘하는 것에 집중하면 되지 괜히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일까? 그런 복잡한 마음이 '경제적 자유'를 이루고 그것을 달성하는 방법을 말하는 자청님이 쓴 이 글을 읽고 조금 진정이 되었다. 아, 무조건 '경제적 자유'만 원해야 하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당연한 깨달음을...).



나는 학계가 좋았다. 진로 조언 및 상담 행사에 가면 늘 나오는 질문인 '회사와 교수 중 왜 그 길을 선택했나요?'에서 교수님들이 늘 말하는 '학문적 연구의 자유'가 나도 좋았다. 물론 연구도 돈이 있어야 할 수 있기에 연구비를 주는 기관과 그 기관이 존재하는 이 사회가 원하는 방향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충분히 내가 관심이 있고 탐구하고 싶은 주제를 정해 파고들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그러한 지적 추구를 통해 만들어 낸 연구 결과들이 나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 차곡차곡 쌓이는 점이 참 좋았다.



회사에 가기로 마음을 정한 요즘은 멍하니 무채색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런 나의 이 가끔씩 알록달록하게 빛나는 것을 느낀다. 바로 어떤 질문에 대을 찾 연구 방법을 찾기 위해 동료와 서로 아이디어를 주고받을 때다.



과학적으로 궁금한 어떤 자연 현상이 있고, 그게 왜 그런지 알고 싶다. '왜'를 알아내기 위해 무슨 가설을 세우고 무슨 방법으로 그것을 확인할지 함께 고민한다. 늘 피곤한 듯 멍하니 잠들어 있던 뇌가 깨어나 명료하게 돌아가고, 뜨기가 힘들 정도로 무겁고 뻑뻑했던 눈에 생기가 도는 것이 느껴진다.



궁금한 마음이 시작이다. 다른 과학자들조차 그래서 그게 왜 궁금한데? 라거나 그래서 그게 왜 중요한데?라고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이 궁금하다. 오래 고민한 문제의 답을 찾는데 도움이 될만한 연구 방법론이 떠올랐을 때 기쁘다. 그 방법이 실패하면 실망스럽다. 연구방법론을 보완해 본다. 실패한다. 실패의 원인을 분석해 본다. 다시 시도해 본다. 언젠가는 성공한다. 성공한 연구 결과를 토대로 처음의 질문에 대한 답에 대해 고민한다. 답을 찾는다.



자연이 왜 이렇게 존재하는지에 대해 내가 알아낸 것은 이 우주에서 지구의 모래 한 알 만큼 작은 조각의 정보일 것이다. 이 정보가 과연 쓸모가 있을까? 그래도 나는 내가 알아낸 사실이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언젠가 한 과학자분이 재밌는 말씀을 하셨다. 과학자들은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관종들이라고. 그럴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하다고.



어쩌면 그 말이 조금은 맞을지도 모른다. 분명 어떤 연구는 더 많은 주목을 받고 더 많이 인용된다. 그래도 많은 과학자들이 그걸 왜 해?라는 말에 관계없이 각자 자신의 연구를 한다. 사실 그걸 왜 해?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은 욕구와 자신이 알아낸 답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욕구가 제일 중요하니까 말이다. 그래도 내가 알아낸 사실에 사람들이 별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실망스럽기는 하다. 한편으론 관심 없는 게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어찌 되었든 '왜'를 알아내는 일이 즐겁다. 모든 학문에,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왜'가 있을 것이다. 내가 관심 있고 즐거워하는 '왜'는 바로 자연 현상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몰두하여 '왜'를 탐구하기에 좋은 곳이 바로 학계이다. 그래서 나는 과학자의 길을 선택했고, 연구자로서 지금껏 학계에 몸을 담고 있다.




똑똑한 사람들 틈에 끼어서 벅차다 느끼고 좌절하기도 한다. 그래도 자연 현상의 신비로움을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노력들이 가득한 학계의 일원으로 있는 게 좋다. 나는 연구 활동이 즐겁다.


 






참고글:

자청의 글, '왜 작가, 교수님은 매일 글쓰기를 하는데 경제적자유가 없나요?'


참고로 <역행자>는 아직 안 읽어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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