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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호성 Jun 01. 2019

신념

1.


종교적인 신념으로 병역을 거부하는 것이 정당한 이유가 된다고 한다. 최근 어느 종교의 신자가 병역을 거부하여 재판받는 것을 접하게 되었다. 22살의 청년을 앞에 두고, 판사와 검사와 변호사가 이것저것 물었다.


그 중 인상적인 질문과 답변. 판사가 '전쟁중이라고 가정하자. 상대방이 총을 들고 당신과 당신의 가족을 모두 위협한다. 당신 옆에 총이 한 자루 있다. 그 총을 들고 저항하는 것이 유일한 생존 방법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당신은 총을 들지 않을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 젊은이는 이에 대해서, '어쩔 수 없습니다. 총을 들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판사는, '당신은 그렇다쳐도, 가족은 어떻게 할 것인가', 역시 답변은 '총을 들지 않겠습니다'였다.


판사는 납득되지 않는 듯이 보였다. (내 느낌일 수도 있다.) 가족을 지키는 의무조차 저버리는 사람이라면, 그 인격을 높게 평가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것일까.


2.


우선, 이 젊은이에게 던져진 각종 윤리적 퀴즈들이 좀 부당하게 느껴진다. 질문하는 쪽에서, '총을 드는 것이, 그리고 오직 이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인 상황에서, 총을 들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고 실험이 직관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에 대한 감을 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현실적인 판단은 어디까지나 그 시대, 그 사회에 닿아 있는 것이다. 질문하는 쪽에서는 모든 상황을 제쳐두고, "A만이 해결책인 상황에서 A를 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라고 묻고 있으나,  A가 지금 여기, 현재 이 사회에서 유일한 해결책인지 아닌지를 따져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고, 만약 A가 유일한 해결책이 아니라면(적어도 논쟁의 여지가 다분하다면) 저 질문은 잘못된 전제 위에 서 있으므로 잘못된 질문이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특정 연령대의 모든 젊은이가 모두 집총훈련을 받는 것이 국가 방위를 위한 유일한 방법인가?


3.


어떤 것이 선한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 여러 이론이 있을 수 있다. 종교의 교리를 따르는 것(가령 십계명), 공리주의(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진화론적 답변(생존과 자연선택에 도움이 되는 행위) 등 등. 판사가 '가족에 대한 보호를 저버리는 것'을 어떤 상황에서도 용납할 수 없는 것, 가장 우선시해야 되는 것이라고 전제한 것이라면, 그는 유교, 맹자의 입장과 가까울 수 있다. 맹자는 '순 임금의 아버지가 사람을 죽였다면 순 임금은 어떻게 했을까요'라는 질문을 받자, '순 임금은 처자 자리를 버리고 아버지를 업고 도망갔을 것이다'라고 답했다. 맹자에게 있어서 부자관계는 그의 윤리관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므로(가족을 기초로 세계로 나아간다), 이보다 우선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


재판받는 젊은이는 교리를 택했다. 그 종파에서는 총을 들지 말라는 것이 신의 명령이고, 그 신의 명령보다 앞서는 규칙은 있을 수 없다. 순 임금이 나라의 통치보다 아버지에 대한 효를 더 중요시 여긴 것처럼, 이 젊은이는 동일하게  (반대 방향이기는 하지만) 가족의 생명보다 신의 명령을 더 중요시 여긴 것이다.


맹자, 이 젊은이 혹은 다른 그 누가 옳은지는 결론 내릴 수 없는 문제이지만, 어떤 입장이든 하나의 입장에 그치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할 수 있다. 판사 역시 단지 하나의 입장에 서서 질문을 던진 것에 불과하다.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문제를 법원이 한 입장만이 옳다고 판결로 풀 수는 없고, 따져야 할 것은 그 젊은이가 그 입장을 진지하게 믿는지 여부이다. 이를 따지는데 다른 입장의 윤리관을 들이대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물론 모든 윤리관에 대해서 진지하게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허용되는 범위를 따지는 것은 다른 문제다.


4.


그 젊은이는 스물 두살이었다. 내가 스물 두살에 뭘 하고 있었는지 잠깐 생각해보았는데, 신념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그 젊은이는 자기 신념때문에 법정에 소환되고, 구속되기 직전까지 가고, 지금도 법정에서 법률가들로부터 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받고 있다.


누구의 삶이 더 확신에 차 있는가. 누가 더 진지하게 인생을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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