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옥. 「무진기행」
나는 「무진기행」을 대학교 1학년 때였던 스무 살에 읽었다. 돌이켜 보면 「무진기행」을 읽기에 꽤 적절했던 시점이었던 것 같다. 내게 「무진기행」은 전환점이나 변곡점 같은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새삼스럽게 다시 「무진기행」을 떠올린 것은 이현우의 『세계문학의 흐름으로 읽는 로쟈의 한국 현대문학 수업』 때문이다. 이현우는 「무진기행」을 ‘순수에서 세속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포착한 현대인의 증상’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왜 「무진기행」을 어떠한 국면 전환과 연관 지어 생각하고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윤희중이 자신의 잃어버린 순수와 청춘을 확인하는 계기를 무진이 제공하기 때문일 것이다.
무진은 결코 순수한 공간이 아니다. 다만 윤희중이 순수했던 어떤 시절을 표상할 뿐이다. 윤희중이 다시 찾은 무진은 속물들로 가득하다. “무진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은 모두 속물들이라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이 하는 모든 행위는 무위(無爲)와 똑같은 무게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장난이라고(「무진기행」,『무진기행(세계문학전집149)』. 서울: 민음사, 24쪽, 이하에서는 쪽수만 인용).” 윤희중은 돈을 위해 돈 많은 과부를 선택했다. 이때 윤희중의 순수와 청춘은 상실되었다.
그럼 윤희중이 무진을 다녀가는 것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물론 직접적인 이유는 본인이 서울에 있기 난처한 상황에서 도피처로 아내가 선택해 준 곳이 무진이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는 부끄러움을 느낄 겨를이 없다. “바쁘다. 자랑스러워할 틈도 없이 바쁘다. 그것은 서울에서의 나였다(33쪽).”무진은 내가 속물이라는 확인하는 하나의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윤희중이 속물에서 잠시나마 탈피하고자 했다면 하인숙에게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 서울로 데려가는 일을 시도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애초에 그 일을 시도할 생각이 없다.
성과 속으로 세상을 이분해 보자면「무진기행」에는 물리적으로 성의 공간이 없다. 서울은 성공의 공간이고 무진은 실패의 공간일 뿐 두 쪽 모다 속물들의 세상인 것은 마찬가지다. 「무진기행」에서 성은 청춘의 시기이다. 즉, 「무진기행」에서 공간적 차원에서 성은 존재하지 않지만 시간적인 차원에서 청춘을 성의 영역에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41쪽).”는 아마도 한국 현대문학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 중 하나, 아니 가장 유명한 문장일 것이다. 이 문장이 중요한 이유는 속물로서의 부끄러움이 근대인이 가질 수 있는 윤리의 출발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윤희중은 부끄러움을 느끼지만 그 부끄러움은 행위의 차원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하지만 최소한 자신도 남과 같은 속물이라는 자각을 하는데 그 자각을 하게 만드는 감정이 바로 부끄러움이다. 「무진기행」을 여러 차례 다시 읽어도 이 부끄러움 앞에서는 여전히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