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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창희 Feb 21. 2022

불가능한 공동체를 향수하게 하는 서사

<나의 아저씨>

1.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26쪽).”     


건축구조기술사인 동훈(이선균 분)은 총체적 위기를 겪고 있다. 변변한 직업 없이 엄마 집에서 얹혀사는 형 상훈(박호산 분)과 기훈(송새벽)을 건사해야 하는 처지인데다 학교 후배인 대표 준영(김영민 분)은 이유 없이 자신을 견제한다. 임원이 되지 않는다면 눈치를 보며 회사생활을 견뎌야 하는 45세 중년의 가장이 견뎌야 할 그리 특별하지 않은 삶의 무게일 수도 있다. 준영이 동훈에게 의도적으로 뇌물을 전달하고 그것을 혐의 삼아 회사에서 내보내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동훈은 준영이 자신에게 잘못한 게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게 된다.          


이 어려운 국면에서 동훈은 파견직 지안(이지은 분)에게 자꾸 마음이 간다. 지안이 자신에게 도움을 줬기 때문만은 아니다.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추문에 시달리는 것이 두려워 지안을 피하던 동훈은 때로는 자기 마음을 다 읽힐 것 같아 지안을 회피한다. 40대 중반의 기혼 남성이 20대 초반의 여성 그것도 부하직원에게 느끼는 묘한 감정을 좋게 봐줄 도리는 없다. 하지만 <나의 아저씨>에서 동훈과 지안의 관계는 이성 간의 연애 감정보다는 친구 간의 우애(友愛)로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어쩌면 그 사이에 있는 어떤 감정일 수도. 동훈은 지안에 대한 정확한 감정을 제대로 얘기하지 않는다. 아마 본인도 지안을 향한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우애를 큰 틀에서의 사랑이라고 한다면 동훈과 지안 사이에 일어났던 일은 무엇인가? 동훈은 준영이 했던 잘못이 아내인 준영과 윤희(이지아 분)의 외도라는 것을 인지한다. 가뜩이나 난맥상에 놓여 있던 삶이 한순간에 붕괴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할머니를 홀로 건사해야 하는 지안은 더 이상 몰릴 데가 없다. 몰릴 데로 몰린 동훈과 지안이 알아본 것은 서로의 ‘결여(缺如)’였을 것이다. 위에 인용한 신형철의 문장에서 발생한 그 일 ‘없음’이 ‘없음’을 서로 알아본 것이다. 신형철은 이 경우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동훈은 지안을 곁에 둘 수 없다. 그러므로 <나의 아저씨>는 짧은 시간 동안 서로의 없음을 알아봄으로써 발생한 일에 관한 서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감싸고 있는 것은 ‘후계’라는 21세기 대한민국에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가상의 공동체다.     


<나의 아저씨>를 보고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 담겨 있는 신형철의 문장을 떠올렸고, 책을 다시 펼쳐보았다. 위에 인용한 문장은 아니고 이 글 후반부에 소개할 문장이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다시 읽기 시작하니 이 글의 레퍼런스는 책 한 권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 ‘후계’라는 굴레에서의 연대     


<나의 아저씨>에 대한 평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제야 <나의 아저씨>를 보기로 결심한 것은 최근에 고민을 가장 많이 털어놓고 있는 분 중 하나가 <나의 아저씨>를 세 번 봤다는 얘기를 듣고서였다. 물론, 술자리였다. <나의 아저씨>에 대해 가장 얘기하기 좋은 것은 술자리일 것이다. 그만큼 이 드라마에서 술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후계라는 지역에서 오랫동안 함께해온 이들은 ‘정희네’라는 사연 있는 사장이 운영하는 집에서 시도 때도 없이 모인다. 그 사연이란 오랫동안 사랑했던 연인이 중이 되어 출가해 버린 것. 술집의 이름은 바로 주인의 이름이고 ‘정희네’는 유교적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낭만적 판타지를 스스럼없이 드러내 보이는 이 드라마의 공간적 구심점이다.     


동훈이 윤희의 외도로 위기에 내몰린 것 같지만 사실 동훈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그의 모든 것인 후계 그리고 가족이다(<나의 아저씨>의 가장 중요한 공간적 배경인 후계역은 실제로 존재하는 역이 아니다). 윤희는 가족과 후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동훈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있어 나는 전적으로 윤희의 편이다. 윤희가 우리의 가족은 동훈, 윤희, 지석(정지훈 분) 이렇게 셋이라고 말할 때 동훈은 아니라고 얘기한다. 윤희가 행한 일탈의 방식을 윤리적으로 문제 삼을 수 있겠지만 윤희가 놓인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동훈은 가족과 후계 사람들에게 갇혀 있는 존재이고 자신의 가족을 불행으로 내몰 수 있는 사람이다.      


나에게 <나의 아저씨>는 정치적 올바름에 있어 다소 불편한 텍스트인데 이 텍스트를 감싸고 있는 것이 유교적인 가족 이데올로기라는 점 때문이다. 물론, 동훈과 윤희의 균열이 가족 이데올로기 때문이라는 점을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성실한 서사라고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나의 아저씨>는 공동체 문화의 판타지와 그것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을 함께 보여준다는 점에서 좋은 서사다. 하지만 무게 중심이 전자에 쏠려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지안은 동훈 때문에 후계를 동경하게 되고 유라(권나라 분)는 기훈 때문에 후계를 동경하게 된다. 하지만 둘 다 각기 다른 이유로 후계로 진입하지 못하는데 나는 지안과 유라가 후계에 편입됐다면 과연 행복했을까라는 가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냉소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후계라는 공간은 밖에서 봤을 때 가장 이상적인 공간이고, 그 점이 텍스트로서의 매력을 발산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후계와 같은 공간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지만 보는 내내 살아보지도 않은 후계가 잃어버린 고향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불가능한 공동체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워하게 만드는 것이 영상 서사로서 <나의 아저씨>가 가진 가장 큰 힘일 것이다. 


3. 우리는 어떤 사람일까?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133쪽).”        


좋은 서사가 하는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인지 되묻게 만드는 것이다. 현상학적으로 말하자면 인간 혹은 나라는 존재에 대해 괄호치고 내가 어떤 인간인지 되돌아보게끔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좋은 서사의 덕목 중 하나라는 것이다. 지안이 동훈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할 때 동훈은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이 대답은 겸양이 아니라 진실에 가깝다.      


40대에 접어든 남성의 입장에서 동훈에 감정 이입해서 <나의 아저씨>를 보지 않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40대 남성 입장에서 봤을 때 동훈은 기본적으로 너무 답답한 사람이다. 찌들 대로 찌들어 보이지만 나한테 상사를 택하라고 한다면 동훈 보다는 동운(정해균 분)을 택할 것이다. 동훈이 가정에서는 후계와 그의 가족들 때문에 윤희를 불행하게 한다면 회사에서는 원만하지 못한 사내 관계 때문에 부하직원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다(그런 면에서 동훈이 자기 팀을 다 데리고 나가서 창업하는 결말도 판타지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동훈은 좋은 사람이 되고자 최선을 다하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결과적으로 나쁜 사람이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철학적이나 심리학적인 이론을 동원하지 않은 인간에 대한 논평 중에서 위에 인용한 신형철의 문장만큼 나를 설득시키는 문장을 만나지 못했다. 우리는 타인은 단순하게 나쁘다고 생각하고 나는 어떻게든 좋은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자기 정당화를 반복해 가며 나쁜 인간이 되어가 십상이다. 동훈처럼.      


하지만 어느 순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고, 그것을 포기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신형철의 문장은 좋은 사람이 되기를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이해하고 자신을 성찰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윤리적인 제스처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안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고 자신의 한계 안에서 동훈은 좋은 사람이 되고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동훈이 한 걸음 더 나아간 지점은 자신이 끝내 정말로 좋은 사람이 되는데 실패했다는 점을 깨달았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인간에 대해 냉소적이고 회의적으로 접근한다고 해도 인간에게 구원은 인간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다. 논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서사를 몇 날 며칠에 걸쳐 종종 웃으며, 때로는 울음을 참지 못하며 보게 된 이유는 나 역시 후계라는 공동체가 주는 위안을 인정하지 않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내게 좋은 서사란 이전에 몰랐던 새로운 인식적 가치를 논리적으로 규명해 주는 것보다는 이미 알고 있던 자명한 명제에 대해 다시 환기해 주는 서사에 가깝다. 전자가 과학의 역할이라면 후자야말로 문학과 같은 서사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때로는 아늑한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설득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나는 후계 같은 공동체에 살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가끔 그런 공동체가 문득 그리워진다면 <나의 아저씨>를 다시 보는 것으로 족할 것 같다. 이것이 최근 들어 가장 몰입해서 봤고, 가장 크게 마음을 움직였던 서사에 대해 내가 표할 수 있는 경의의 최대치다.       


동훈에게 후계 밖의 공간도 가끔 살펴보라고 나는 감히 얘기할 수 없을 것 같다. 때로는 지옥 같고 때로는 천국 같을 그곳에서 부디 잘 버티어 나가시길. 지안에게 동훈 같은 사람을 다시 만나길 기대하라고는 차마 얘기하지 못하겠다. 동훈과 후계와 맺었던 좋은 추억을 잘 간직하고 살아가기를. 우연히 겨울에 보게 된 드라마인데 겨울에 보기 좋은 드라마다. 이유 없는 한숨이 나올 때마다 다시 찾아보게 될 것만 같은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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