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라는 컨베이어 벨트에 브레이크 걸기로서 영화 보기

김혜리.『묘사하는 마음』.

by 노창희

영화에 대한 말들이 넘쳐난다. 영화 보다는 영화에 관한 말들에 관심이 더 많은 나는 영화 관련해서 듣는 팟캐스트가 몇 가지 있는데 김혜리의 ‘필름 클럽’도 그중 하나다. 이실직고하자면 ‘필름 클럽’이 원픽 영화 팟캐스트는 아니다. ‘필름 클럽’보다 훨씬 수다스러운 팟캐스트가 내 홈구장이다(공교롭게 그 팟캐스트도 ‘필름 클럽’과 마찬가지로 SBS와 관련된 팟캐스트다). 하지만 영화에 관한 글에 관해서라면 내가 가장 신뢰하는 필자는 압도적으로 김혜리다. 이동진으로 영화에 관한 말과 글에 입문한 나는 이제 김혜리의 글을 가장 기다리는 독자가 되었다. 『묘사하는 마음』이 “기사를 퇴고해 묶는 책으로는 마지막일 것 같은 예감(10쪽)”이 틀린 것이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는 왜 영화관에 가는가? 영화가 주는 속도감이 갈수록 빨라지는 상황에서 다음의 문장이 과연 유효한지 되묻는 이가 있다면 그 역시 타당하다고 얘기하겠지만 나는 다음의 문장에 온전히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21세기 들어 새로운 소식이 있다면 영화관이 우리가 삶을 주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가 되었다는 점이다(297쪽).”스마트폰을 잠시도 놓지 못하는 나는 극장에서도 스마트폰을 포기하지 못하는 쪽이다. 하지만 극장만큼 스마트폰과 나 사이의 간극을 넓히는 공간은 없다. “영화는, 자력(自力)으로 멈추기 힘들게 돼버린 이 컨베이어 벨트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힘을 가졌다(297족).”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영화들에 불만을 갖게 되는 것은 영화라는 비즈니스가 과도하게 캐릭터와 IP에 집착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특정 생산요소에 과도하게 많은 예산을 투자하게 되면 희생이 뒤따르기 마련인데, 매번 그러리라는 법은 없지만 비주얼에 비해 앙상한 서사는 영화에 몰입하기 어렵게 만든다. “영화는 이야기가 전부가 아닌 매체이지만 서사의 우주에 공헌하기를 멈춘다면 이야기는 언젠가 영화에 복수할 것이다. 비즈니스가 예술을, 아니 엔터테인먼트를 잡아먹을 때 애초에 영화가 비즈니스가 될 수 있게 만들었던 창의성은 비즈니스를 역습할 수 있다(326쪽).”앞에 문장에는 개인적으로 동의하지만 전적으로 수긍하기는 어렵다. 미디어 산업을 연구하는 것이 업인 사람의 입장에서 캐릭터 자체가 주인공자이자 리스크를 회피할 수 있는 전가의 보도로 활용되는 지금의 이 흐름을 무엇이 어떻게 제어할 수 있을지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 비평이 왜 필요한지 말할 때다. 엄혹한 산업의 논리를 비평으로 제어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눈 밝은 관객들은 좋은 평론에 민감하다. 그리고 평론의 영역은 작품 자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최근에 개인적으로 하고 있는 고민 때문에 「네버 엔딩 스토리의 위험」에 있는 위의 문장을 보고 골똘해 질 수밖에 없었다. 비평이 산업의 방향을 비틀 수는 없지만 많은 관객에게 울림을 줄 수는 있다. 그리고 그 울림이 언젠가는 산업에도 영향을 미친다. 김혜리 같은 영화에 관해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많아야 하는 이유다.


“내게 해석은 묘사의 길을 걷다 보면 종종 예기치 못하게 마주치는 전망 좋은 언덕과 같았다. 묘사하는 마음이란, 그런 요행에 대한 기대와 ‘아님 말고. 이걸로도 족해’하는 태평스러운 태도를 포함한다. 묘사는 미수에 그칠 수밖에 없지만, 제법 낙천적인 행위이기도 하다(11쪽).”많은 고민이 느껴지는 글을 쓰는 작가가 해석을 낙천적인 행위로 보고 있다니 다행스러운 마음이 든다. 아니 삶 자체에 아무런 희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영화에 관한 글을 쓸 이유도 없을 것이다. 삶에 대해 그리고 영화에 대해 아무리 삐딱하게 보더라도 최소한의 선의나 희망이 글을 쓰는 동력이 될 수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때로는 초조함을 느끼면서 때로는 권태를 느껴가며 삶은 지속되지만 결국 삶이 지탱되는 이유는 조금이라도 더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보는 마음도 영화를 해석하는 마음도 마찬가지 아닐까? 김혜리가 쓴 것과 같은 좋은 글들은 그러한 선의를 뒷받침해 주는 근거가 된다. “반복 자체는 두려워할 저주도 안전한 성도 아니다. 분명한 진실은, 우리가 비슷한 장소에서 비슷한 미덕과 결함을 가진 사람들과 비슷한 행위를 거듭하면서도 끊임없이 조금 더 잘 살기를 소망한다는 사실이다(256-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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