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일기』.
소설가에 대한 신뢰로 시작했다가 실망으로 끝난 에세이가 꽤 있다. 나쁜 에세이라는 말은 아니고 소설에 대한 기대치 때문에 에세이를 상대적으로 덜 재밌게 읽었다는 뜻이다. 반대로 소설보다 에세이를 더 인상적으로 읽은 경우도 많다(에세이가 소설보다 좋다는 것이 소설가에게 칭찬일 수는 없을 것이다). 황정은이 에세이를 출간한다고 했을 때 이상하게 실망할 것이라는 우려 자체가 없었다. 이미 황정은이 다른 작가들과 공동으로 집필한 에세이를 인상적으로 읽은 경험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황정은이라는 자연인에 대한 믿음 때문에 실망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단 한 번도 보지 않은 이에게 이런 신뢰를 갖게 되는 건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소설로, 팟캐스트로 내가 간접 체험한 황정은은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지만 신뢰를 준다.
꼭 코로나 때문이 아니더라도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가 이어지고 있고,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계절에 황정은의 에세이가 출간되었다는 소식은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일기』에는 원고 노동자로서 감내해야 하는 고통부터 내밀한 사적인 상처까지 황정은 개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나와 다른 타자가 나처럼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내게 위안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이것이 싸구려 감정이라는 점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 자체가 부정적인 감정이라고 치부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여기서 그치기를 원치는 않는다.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간접 체험이 싸구려 감상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상상력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것은 소설과 에세이 둘 다 지향해야 할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두꺼운 책을 앞에 두고 한숨을 쉬는 경우는 흔하지만 가벼운 책을 읽으면서 아껴 읽게 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황정은의 『일기』가는 드문 후자에 속한다. 『일기』 전체를 받아 적을 수는 없으므로 「일년 一年」에 대해서만 짧게 얘기해 보려고 한다. 이 에세이는 전반적으로 코로나가 초래한 개인적, 구조적 변화를 다루고 있다. 황정은은 개인의 일에 영향을 미쳤을 구조의 체계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구조를 전면으로 내세우는 법은 드문 작가다. 예외가 있다면 『디디의 우산』에 「d」와 함께 실려 있는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정도일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과 그것을 이끌어 낸 촛불에 대한 사적인 체험이 반영된 작품이라고 생각되는데 너무 좋아하는 작품이라는 것 외에는 달리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일상적 단계회복’시기에 접어들었지만 코로나가 초래한 위험은 여전히 우리 가까이에 있다. 코로나와 함께한 시간은 일 년을 훌쩍 넘어 이 년이 되어 가고 있고, 이 와중에 우리는 이제 코로나에 걸리더라도 일상을 영위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대한민국이 방역에 성공했는 지에 대해 얘기하는 일은 쉽지 않다. 방역으로 인해 우리의 자유는 침해되었고, 사사로운 나의 일상이 언제든 공개될 수 있게 되었다. 백신 공급은 원활하지 못했으며, 그로 인해 일상으로 복귀하는 시기도 늦어졌다. 하지만 다른 국가보다 월등히 적은 확진자 수와 대한민국의 방역 체계를 예찬하는 외국 학자들의 말까지 종합하면 과연 방역의 성공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지 머리를 갸웃거리게 된다.
나는 지금의 시국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건넬 수 있는 최대치의 선의가 다음에 소개할 황정은의 문장에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이 걱정의 바탕은 자기가 남에게 병을 옮긴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일 수도 있고 우애일 수도 있다(38쪽).” 실제로 나의 마음도 그러했다. 내가 확진될 두려움보다 내가 남에게 바이러스를 옮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이 마음은 선의보다는 비난의 대상이 되기 싫다는 수동적인 도덕심이 작용한 것일 테다. 하지만 나에게 피해를 주기 싫다는 너의 선의가 우애로 돌아왔다고 생각하는 일은 결코 그릇된 생각은 아닐 것이다. “내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무사(無事)는 누군가의 분투를 대가로 치르고 받는 것이라는 생각을 종종한다(41쪽).” 나의 무사가 너의 우애 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일. 대한민국이 견뎌온 2년 가까운 세월 속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건넬 수 있는 최대치의 선의이자 예의일 것이다. 다음의 문장을 옮기며 마친다.
“건강하시기를.
오랫동안 이 말을 마지막 인사로 써왔다. 불완전하고 모호하고 순진한 데다 공평하지 않은 말이라는 것을 알지만, 늘 마음을 담아 썼다. 당신이 내내 건강하기를 바랐다. 지금도 당신의 건강, 그걸 바라고 있습니다. 건강하십시오. 우리가 각자 건강해서, 또 봅시다. 언제고 어디에서든 다시(8쪽).”